에필로그
나이가 들면 자리가 잡힐 줄 알았다. 적당한 일자리가 아닌 내 인생을 거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것, 그리고 사랑하는 처자식이 곁에 있을 것. 나라면 이 두 가지를 얻어야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고 생각할 거다. 나는 아직 어느 것도 얻지 못 했고, 그래서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아직 30대 후반에 불과해서 그런 걸까? 흔들리지 않는, 그러니까 불혹의 나이가 되면 자리가 잡히려나?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자신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버리는 거다.
한번은 평생교육원에 방문해 본 적이 있는데,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강좌들이 인기였다. 사람들은 반평생을 살고도, 오래도록 자신을 움직여온 어떤 일에서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모른다니 슬픈 일이다. 열심히 살아도 자신을 모른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이 지구의 NPC(Non Player Character) 역할인데 자꾸 그 이상을 바라니까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만드는데 45억 년이 걸린 이 세상 무대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의 행동범위만을 허락받은 마을사람 A일 뿐인 거다. 이 세상에는 이미 주인공들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손흥민 이런 자들이 주인공이겠지. 심지어 임영웅은 이름마저 영웅인 것이다.
중국에는 ‘탕핑’이라는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졌다고 한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방법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드러누운 부추는 벨 수 없다는 구호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는 결혼과 출산에서 탕핑하는 것일까? 적어도 나의 부모는 나를 결혼 탕핑족으로 생각하실 거다. 그래도 나는 소개팅과 각종 모임과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몇 년간 엄청나게 노력했으니 그 과정을 조금은 인정해 주시길 바라지만, 그래도 현재 상태가 중요한 거다. “결혼했냐고 그래서 네가 결혼했냐고 결과가 중요하다고”, 우리 엄마의 말씀이다.
「You only live once」 인데, 결혼과 육아를 못 해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분명 있다. 지금 결혼과 육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이 든다. 그런 운명의 상대방을 만났다는 것은 물론이요. 책임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물론 한참 윗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겠지만. 전쟁통에도 애는 태어났고, 단칸방에서 여럿이 자랐던 시절이니까. 지금은 SNS가 모든 것을 망친 것 같다. 가장 강력한 인구조절 장치는 전쟁도 아니고 재해도 아니고 정책도 아니고 바로 인스타그램인 거다. 이렇게 각박한 현실과 소멸하는 나라에서 육아하는 자들을 보면, 자신들은 이 세상의 모든 콘텐츠를 과금하고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자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봐요 평범한 사람들, 우리는 무려 아이를 낳았어요.”
우연히 영화평론가 이동진씨의 직업과 퇴사에 관한 인터뷰 영상을 봤다.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싫어하는 일을 아예 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선택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필연적으로 싫어하는 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데, 자신은 그것마저도 용납할 수 없었다는 거다. 멋지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싫어하는 일 투성이고 좋아하는 일도 얼마 없다. 게다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의 종류는 대부분 정해져 있는 것이고, 단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재능과 조건이 있는지 여부로 갈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결혼과 육아 얘기로 돌아가자. 결혼과 육아를 한다면 좋은 일도 있지만 분명히 싫어하는 일들이 패키지로 가득 딸려오게 될 것이다. 나만해도 내가 부모님께 했던 짓거리들을 돌이켜본다면, 나 같은 자식은 키우고 싶지 않은데, 내가 낳은 자식이 나보다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효자효녀가 갑자기 뚝하고 나서 길러질 수는 없는 거다. 그래, 분명히 싫어하는 일이 가득 생기겠지.
소멸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혼하고 2세를 키우는 것은 나라를 살리는 일이 분명하다. 영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영웅일까,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일이 내 인생의 과업인지 그 소명조차 부여받지 못 한 NPC가 굳이 ‘영웅의 여정’을 나설 자격이 있을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일단 하고 나서 후회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프로파간다가 세상에 만연한데 조금은 괘씸한 거다. 책임져주지도 않을 거면서 자신은 잠깐 멋진 말에 취해 떠들 뿐인 거다. 결혼해서 어떻게 살아라 부부란 이런 것이다, 주제넘은 축사를 읊는 승려들도 마찬가지다.
혼자를 연습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부부가 되는 것은 서로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부터 가정이란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혼자인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에게 걸린 제한과 결핍을 받아들이는 거다. 이 세상의 모든 콘텐츠를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거다. 한번은 국내 유명 여행지에 혼자서 놀러 갔었다. 그런데 찾아가는 모든 식당이 기본 2인분부터 주문이 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나는 2인분을 시켜서 주린 배를 비로소 채울 수 있었다. 많은 양을 남겨 버리고 말았다. 큰 마음먹고 홀로 놀러 간 관광지에서 사 먹는 밥조차 DLC(Downloadable Contents; 본품 외에 추가 구매가 필요한 콘텐츠)의 개념이 적용되는 셈이었다. 불완전한 콘텐츠들을 이용한다는 개념은 남은 시간을 살면서 앞으로의 인간 관계와 가족의 범위, 미래의 경조사, 언젠가 남겨야 하는 유언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점은, 결혼이 인생에 있어 DLC인 세상이고, 출산과 육아는 더욱 프리미엄 DLC인 세상이다. 모두의 눈이 너무 올라가 버렸다. 결혼의 기준, 육아의 기준, 이상적인 가족생활의 기준. 나도 자식에게 영어 유치원 보내주고 싶을 것이고, 전문직으로 키우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재력과 여유가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 흔들리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적당히 키울 수는 없는 일이다. 인도의 20대 청년 라파엘 새뮤얼은 부모가 동의 없이 자신을 낳았음을 고소했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세상에 자식을 낳는 죄악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글을 남겼다. 현재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낳음 당함’이란 표현이 밈으로써 사용되고 있다.
청년들 중에 은둔형 외톨이가 많아지는 것이 지금 사회 문제라고 한다. 취업하지 않고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 전업 자식이자 자택 경비원의 역할을 하는 청년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은둔 청년들을 돕는 정책들이 속속 생기고 있는데, 왜 중간 세대에는 이런 지원책이 없을까 싶다. 나는 결혼이나 만남에 관해서는 어떤 지원도 받아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나도 광의의 개념으로는 히키코모리로 분류될 수 있을 거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렇다. 데이트나 단체활동을 하지 않는 요즘, 내가 누구를 만나러 나간 적이 있던가? 단지 평일에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비 은둔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아프지 않은 것이 건강한 상태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혼하지 않는 지금이지만, 사실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의 규모가 제법 된다. 결혼정보회사라는 사업장들이 돌아가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그러니 결혼하지 않는 현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 현실이 너무 각박해서 결혼을 포기하는 자들이 늘고 있다. 둘,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기 위해 애쓰지만 도저히 짝을 못 찾는 자들이 늘고 있다. 홀로 존재하는 이성을 발견했고 × 그 이성이 나의 이상형이고 × 마찬가지로 내가 상대방의 이상형일 확률을 계산해 보면 너무나 어려운 거다. 이 어려운 확률 싸움에 지친 나는 후자에서 전자로 관점이 이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연이나 운명의 덕택으로 짝을 만나게 된다면, 지옥 같은 세상일지라도 함께 헤쳐 나가고 후손을 기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 내게도 결혼과 육아라는 고행의 길을 걸어갈 각오가 한때는 있었으니까. 종말이 가까운 나라를 함께 살리고 싶었으니까.
비혼 선언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 이를 취소하고 결국은 결혼한 자들의 사례를 몇 알고 있다. 인생에서 사랑과 결합이라는 것만큼 강렬한 콘텐츠는 없나 보다. 나는 비혼 선언을 할 생각은 원래부터 없었다. 내가 비혼 선언을 했다면 결혼시장에서의 싸움과 패배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비혼 선언이었을 거다. 그렇다고 결혼 선언을 하는 것도, 혹은 결혼에 관한 신념을 떠들어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냥 조용한 결혼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저런 현실 때문에 결혼을 못 해서 결혼 생각은 없노라고 말하는 것이지, 사실은 전부 조용한 결혼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모두가 조용히 결혼을 기대한다. 상황이 어려워서, 짝을 만나지 못 해서, 혹은 지치고 슬퍼서, 그래서 늦어지는 거지 대체 누가 처음부터 결혼하기 싫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NPC들의 재생산 거부로 인한 나라 소멸의 주역으로서, 드디어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역사에 한 번 기록되겠지. 어쨌거나 이런 환경에서도 몸을 힘들게 조작하며 움직이고 있는 건 우리 결못남녀 세대 자신이다. 인류가 유구히 즐겨온 콘텐츠를 우리는 못 즐기는 것인가, 나의 다음은 없는 것인가, 항상 결핍된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라며 슬프게 생각하며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것이 우리 결못남녀 세대란 말이다. 복잡하고 비통한 속사정도 모르면서 결혼 안 하는 세대라며 돌을 던지는 것은 조금 억울하다.
202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