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룸펜 Oct 15. 2023

내 인생이 찍먹인 거 같아서

결못남은 반성할 게 많아서

  한번은 인터넷에서 마음에 쏙 드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이별 후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나날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는데, 댓글들이 처참했습니다. 공개된 커뮤니티에 섬뜩하게 글 쓰지 말고 정신과 치료를 마저 잘 받아보라는 식의 반응이 가득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글쓴이처럼 어딘가 어긋난 사람인 걸까, 망가진 사람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역시 위로의 댓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원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예전에, 저는 얼마나 아프면 정신과병원에 상담을 받으러 가도 되는지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힘든 상황에서는 오히려 정신과에 방문할 생각은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다시 작동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때 정신과병원에 방문했었다면 더 빨리 극복했을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목장의 주인이 알파카를 끌고 나왔습니다. 죽음을 예상한 알파카는 몸부림을 쳐 가까스로 줄을 풀어내고 초원으로 도망쳤습니다. 주인은 도망친 알파카를 다시 잡아 와서 죽였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알파카가 있었지만, 집행 유예는 없었습니다.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몸부림과 도망침까지도, 주인에게는 무료한 나날의 감상이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추구하는 다음 단계에 도달하지 못 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저의 최근 몇 년을 돌이켜 보면, 회수되지 않는 복선들이 가득한 인생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내년에 결혼하는 것을 전제로 만나자, 올해와 내년까지 결혼 운이 강하게 있어요, 우리는 성당에서 결혼하면 어때? 따위의 지켜지지 못 한 약속들, 실현되지 못 한 예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기분입니다. 다시 도전할까 한 번씩 생각하지만, 지난날의 무가치했던 약속과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던 기억들 때문에, 저는 이내 반드시 죽게 된 알파카를 떠올리곤 합니다.


  잠을 설치고 깬 어느 새벽 3시에 제가 잠을 얕게 취하는 것처럼 인생도 얕게 취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탕수육은 부먹인지 찍먹인지 고민하지만, 저는 인생을 찍먹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어느 관계에도 풍덩–부먹하지 못 하고, 이곳저곳 찍먹–찍먹–찍먹으로 살다가, 남은 살덩이는 차게 식어 찍먹조차 하지 않고 버려지게 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잠들지 못 하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저와 친해지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의 친목 제안을 거절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친해질 수는 있지만 결국 헤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무엇도 끝까지 지속하지 못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을 또 잃고 슬퍼하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비겁한 변명만 가득 늘어놨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찍먹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의 거리감을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불행을 회피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어쩌면 잃는 것이 정해진 사람이니까.


  무엇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저는 사랑을 지속하고 이미 결혼했을 겁니다. 저는 외로울 틈이 없었을 겁니다. 찍먹하지 않고 진실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면, 저는 편히 잠들 수 있었을 겁니다. 괴로운 기억들을 떠올려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 깨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일상에 감사하고 내일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외롭다고 말할 수 없어서 저는 걷습니다. 저를 안아줄 것은 햇살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12화 나를 드라이클리닝해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