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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Oct 02. 2023

결못남이 기억하는 세계

결못남은 실패한 만남이 많아서

  요즘은 기억이 선명하지 못 하다. 따져 보니 나는 결혼정보회사(이하 결정사)를 세 번이나 가입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번이라고 믿고 살고 있었고, 지난 일기장에도 그렇게 써왔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무려 세 번이다. 유명 대형 업체에 가입하기 전에, 개인사업자 중매쟁이의 서비스를 이용했던 사실을 나는 비로소 떠올렸다. 가입비가 있었던가. 있었어도 없는 수준으로 작았을 거다. 대신 결혼 성사 시 지불해야 하는 보상금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듣자 하니 성혼사례금의 액수가 큰 업체들의 경우, 성혼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악성 이용자들이 있다고 한다. 화장실 이용 끝났더니 마음이 바뀌는 괘씸한 사람들도 결혼하는데 나는 어째서… 그렇지만 어떻게든 받아낸다고… 아무튼, 그렇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이런저런 일화들을 더 까먹기 전에 적어서 남겨두는 게 좋겠다.


  결정사에서 일하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채용공고를 검색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역시 미친 생각이지, 나 같은 사람들을 비위 맞추고 어르고 달래서 권유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면 나는 매일 밤잠을 설칠 것이다. 너무나 고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소멸하는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한국결혼정보공사 같은 게 설립된다면 그곳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일해볼 생각이 있다.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생각한 것들은 대부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이뤄졌다면 나는 이미 결혼했을 것이고 칸쿤이나 몰디브에 다녀왔겠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묶어서 다녀오는 것도 좋았을 거다. 아니면 크루즈 여행을 추천한다는 여행사 직원(과거 어떤 모임에서 친해진 남성, 코로나19로 여행사 사정이 어려워지며 연락이 끊겼다)의 제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는 친구들과 부부동반 캠핑도 갔을 것이고 많은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딱히 한 것도 없으면서 추석 연휴가 끝나가는 것에 홀로 괴로워하는 일 대신 말이다. 


  기억이 뒤죽박죽이고 선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은 기억난다.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 여행에서도 뒤로 갈수록 점점 좋은 숙소를 이용해야 한다. 마지막 기억이 여행 전체를 평가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총각의 혼활 여정의 끝도 결혼으로 마무리됐어야 아름다웠을 거다. 중도 포기가 아닌.



  한강의 처음과 끝이 어디인지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는 한강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단순히 한강에 많이 갔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한강을 많이 갔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무려 첫 만남부터 바로 한강으로 직행하던 때가 있었다. 실내집합금지, 백신패스 같은 것들 때문에 아무 곳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강이었고, 공원이었고, 차 안이었다. 초반에는 커피숍 안에 착석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시점이 겨울이었는데, 결혼에 목숨 건 결못남녀들은 마스크도 내리지 않은 채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한강까지 오들오들 떨면서 걸어갔던 일들이 있었다. 실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며 말이다. 아니 들고 있는 그 커피 한 모금 대체 언제 마실 거예요.





  한번은 한강공원에 가본 적이 없다는 희귀한 여성을 만나게 된 일이 있다. 서로가 서로의 이상형이 전혀 아니었지만, 봄날은 좋고 시간은 남고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외출할 핑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혼시장에는 이런 식으로 쉬어 가는 코너로 서로를 만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주말에 누구라도 만나지 않으면 결혼을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부채의식이 결못남녀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기준에 못 미치는 아쉬운 상대라도 만났다면, 노력한 나 자신 칭찬해 이런 식으로 위로하는 거다. 언젠가 만나게 될 운명의 상대방을 위해 미리미리 면접 연습하는 셈 치는 거다. 또는 오늘도 꽝스택 불운쿠폰 하나 적립했으니 당첨까지는 얼마 안 남았다고 정신승리하는 거다.


  이상형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을 자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어떤 남자 때문이다. 웃통을 벗고 황금빛 햇살을 구릿빛 몸으로 반사하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달려갔기 때문이다.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아니 나도 저런 몸을 갖고 있다면 벗고 달리지 않았을까. 그의 특권인 셈이다. 특권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바보인 거다. 나에겐 특권이 없다. 한강이 처음이라는 사람에게 한강을 안내해 주고, 여기서 이것으로 종료되는 그 정도뿐이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요. 다음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요. 관계의 발전을 암시한 것도 아니요. 성적 긴장감의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도 아니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많은 첫 만남의 데이트가 그래왔다. 밥 사주고 태워주고 재밌게 해주고 결혼하기가 참 어려워요 따위의 상담이나 허구한 날 들어주고 말이다. 심지어 궁궐을 안내해 준 적도 있다. 게다가 내가 즐겁게 해주는데 돈도 내가 내는 거다. 차라리 이럴 거면 관광가이드가 되어야겠다. 안내해 주고 즐겁게 해주는 대가로 내가 돈을 받을 거 아닌가. 그래, 의외로 천직일 지도 모르겠다. 





  한강도 멋지지만 물이 있는 곳들은 대부분 데이트 장소로 훌륭하다. 동네의 이름 있는 하천부터 저수지도 괜찮은 거다. 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생겨버리는 거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고, 물이 있으라 하니 분위기가 생긴 셈이다. 송도 센트럴파크도 좋고, 백운호수도 좋고, 광교호수도 좋고, 동탄호수도 좋다. 한강에서 데이트한다면 밥 먹을 곳을 정하고, 그 코스를 생각하며 걸어야 하는 모든 일이 신경 쓰이는 법이다. 한강의 처음과 끝의 사이에서 파생되는 경우의 수는 무한대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호수들은 정해진 대로 한 바퀴 돌면 밥 먹을 곳은 몇 군데로 이미 정해져 있다. 광교호수공원의 이탈리안 음식이 맛있었다. 물론 내가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돈도 내가 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여자가 예뻤다. 아니 착각했다. 이탈리안 음식을 같이 먹은 것은 다른 여자다. 그 여자는 별로 예쁘지는 않았는데 단지 스펙이 압도적으로 좋았기 때문에 내가 샀다. 어째서 전문직이고 잘 사는 집 딸내미인데 내가 밥을 사야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다. 당시의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던 거다. 결정사 만남에서는 남자가 사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주도권이 없는 만남이었기 때문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그 여자는 미차감으로 나왔을 거다. 결정사 하시면 이런 스펙의 여성 분도 만나 보셔야지요, 라는 매니저의 감언이설에 아까운 횟수만 한 번 날린 셈이다. 예쁜 여자애는 소개팅앱으로 매칭된 거였는데 그녀가 밥을 샀다. 내가 멀리서 광교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며 말이다. 예쁘면 마음씨도 예쁜 것 같다. 물론 나도 잘생겼으면 훨씬 좋은 마음씨의 바람직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거다. 관계는 발전되지 않았고 반년 정도 지나도 생각나서 다시 연락하려고 찾아보니 결혼식 사진으로 프로필이 바뀌어 있었다. 아쉬웠다.


  그런데 그 당시가 부동산 폭등기였기 때문이었는지 광교 여자들은 집값을 은근히 강조했다. 서울이 아니지만 비싸다고요, 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이 동네는 뭐가 유명하냐고 물어보니 무슨 아파트가 유명하다는 해괴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광교 여자들뿐만이 아니다. 강남 살던 여자, 마포 살던 여자, 노원 살던 여자, 과천 살던 여자, 심지어 일산 살던 여자들까지 전부 자기네 부모님 집 가격이 어쩌고 저쩌고, 아 네네네. 근데 그게 당신 명의는 아니잖아요. 어차피 나랑 혹시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결국 내 집에서 살 거 아닌가요. 그거 나 줄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이 올랐으면 밥이라도 좀 사든지. 아무튼 부동산 폭등기가 종료되고 금리가 상승한 지 한참이 지난 요즘의 결못남녀 첫 만남의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하다. 제 취미가 임장이구요, 재테크 공부구요, 미국주식투자구요, 골프구요, 오마카세구요, 오픈런이구요, 이랬던 사람들의 허영심이 싹 사라진 분위기가 요즘이려나. 전부 한강에 계신가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확인차 한강에 혼자 다녀왔다. 둘이 가면 데이트코스 혼자 가면 사색코스로 완벽하다. 뜨거운 햇살 아래 몸을 번쩍이며 달리던 남자가 한 번씩 생각난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여자들을 기억한다. 그녀들은 결혼에 성공했을까.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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