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내 옆에서 애정행각은 참아주세요.
결못남은 분노 조절이 안 돼서
1.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어느 것이 더 불쾌하고 참을 수 없을까? 지난번, 나는 최악의 비행을 경험했다. 정말 오랜만의 해외 여행이라서 부푼 기대를 갖고 다녀왔는데, 출국 편과 귀국 편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난감한 비행이었다.
2. 출국 편. 나의 왼쪽, 즉 창가 좌석에 앉은 남성은 틱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우측의 팔과 다리에! 약 5시간의 비행 내내 자신의 오른쪽 신체를 흔들며 나를 공격했다. 눈치와 온화한 경고를 주었더니 진정하는 것 같았으나, 통제할 수 없다는 식으로 몸을 이내 휘둘러댔다. 나의 육체는 5시간 내내 지속적으로 침략당했다. 우측에 앉은 내 어머니 대신 내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겼다.
3.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책을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작중의 소년들이 이런저런 고통을 참는 연습을 하길래(움직이지 않는 연습, 굶는 연습, 등등), 좋아 나도 어디 한 번 고통을 참아보자 결심했다. 그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예능 프로를 보며 낄낄대며. 내가 받는 고통에는 자신의 지분은 전혀 없다는 것처럼. 어쨌거나 나는 참는 연습에 성공했다.
4. 귀국 편은 정신 고문이었다. 돌아올 때는 어머니와 떨어져 각각 복도 좌석에 앉았는데, 체크인이 너무 늦어서 제일 안 좋은 맨 뒷자리(좌석 각도가 조절되지 않는!)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뭐, 틱장애를 가진 사람 옆에만 앉지 않는다면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내 오른쪽 두 자리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느 남녀가 앉았다. 둘 다 말끔하고 심신이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다. 쉴 새 없이 떠드는 둘의 이야기는 이어플러그로 막은 내 고막으로 흘러 들어왔다. 업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연인의 느낌이었는데, 비즈니스 목적의 출장이었나? 이런 쪽으로의 나의 촉은 대부분 맞는 편인데, 아니란 말이지?
5. 어느새 여자는 남자에게 반말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존댓말을 하며, 비즈니스 관계와 사적인 관계의 중간쯤의 느낌으로,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얘네 뭐지 대체’. 그러다 30분쯤 지났을까? 둘은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아 뭐냐고 너네 대체’. 출장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발전시켜 오다가 지금 막 이제 손잡고 사귀게 된 거야? 이제 그 임계치를 돌파한 거야? 그런 거야?
6. ‘제발 내 옆에서, 비행기의 가장 구석에서, 둘이 뽀뽀까지는 하지 말아 주라’. 비행기 내에서 음란행위를 하지 말라고 기장이 안내하는 규정 같은 건 없을까. 이륙 30분 만에 손깍지로 발전했는데, 남은 4시간 동안 그 어디까지… 발전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일 거다. 그동안 얼마나 서로를 만지고 싶었을까? 아 젠장, 젠장, 젠장, 너무 신경 쓰여. 나의 존재감을 옆에 발산해야 하나? 내가 틱장애가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할까?
7. 그나저나 이 항공사는 나랑 악연이 있는 게 분명하다. 과거에 이용했을 때 운행이 지연됐었는데, 이번에도 지연이 발생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승무원끼리 썸 타는 중이라(남자가 상당히 잘생겼었다), 쉴 새 없이 플러팅을 주고받으며 떠들어 대서 짜증이 났었는데, 이번엔 내 옆에 앉은 젊은 남녀가 회사 동료에서 끈적끈적한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 이 자리입니까, 여러분, 왜요, 대체 왜.
8. 남자는 멀미를 시작한 것 같았다. 이 상황이면 뽀뽀는 못 하겠지! 아닌가, 이 정도의 고통 따위는 사랑의 욕구가 압도하려나. 여자의 극진한 간호가 시작됐다. 핸드크림을 발라서 손도 주물러 주고, 머리도 지압해 주고…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안쓰러운 간호의 손길이 분명했다. 애정이 가득한 게 내 우측으로부터 느껴졌다.
9.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이지 밥상머리 교육이 부족한 것 같다. 자신의 신체 및 그 연장선이 남의 영역에 침범하게 하지 않는 법을 사회화의 과정 그 어디에서도 교육받지 못하는 것 같다. 내 뒤의 화장실로 향하는 사람들은 내 앞자리 좌석을 누르며, 정말 모두가 정확히 헤드를 잡고 꾹 누르고 지나갔다. 내 앞자리의 남자는 그때마다 잠에서 깨며 고통스러워했다. 물론 나도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잘 수 없었고, 여행 기간 동안 읽던 책을 계속 읽었다. 멀미가 심해진 남자는 그의 누나에게 기대어 잠들었다.
9. 다행히 뽀뽀까지는 하지 않고 비행기는 착륙했다. 나는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를 재촉해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이제 저들이 진짜로 사귀는 관계가 되는 건지, ‘누난 내 여자니까 넌 내 여자니까’, 이렇게 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아! 혹시 얘네도 무슨 일종의 연습을 하는 거였을까? 사귀지 않는 척 연습 뭐 이런 거…?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플레이인가…? 아 모르겠다. 그냥 도망쳐야겠어.
10. 불행히도 입국 수속을 마치고 인천공항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이 알 수 없는 연인’을 또다시 발견했다. 그런데 이제는 연습을 다시 시작한 건지 뭔지, 서로 또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 모르겠어 요즘의 연애는’.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귀국 편에서 다 읽고 가까스로 이해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02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