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모두 각기 다른 욕망의 결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유례없는 기상 난동은, 2025년 8월의 현실처럼 『어둠의 사육제』 책 속에도 존재했다.
『어둠의 사육제』 책 속의 그 해는, 사월이 다 가도록 우박 같은 진눈깨비가 흩뿌려댔고, 오월엔 봄도 없이 수은주가 삼십 도를 오르내렸으며, 유월엔 유황 가스 같은 아열대 기류가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미친 여름이었다.
책의 제목 『어둠의 사육제』가 주는 분위기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서구에서 성행했던 카니발 축제 문화와 어떤 연결고리를 찾게 했지만, 흥겹고 화려한 카니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매년 2월 말에 열리는 이탈리아 산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를 가득 메우던 카니발 가면이 생각났다. 축제가 끝나고 버려진 값싼 가면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텅 빈 눈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공허함이 드러났다.
누군가 그 가면을 쓰지 않는다면, 눈동자를 얻을 수 없다.
화려한 카니발 가면도 누군가의 분신으로서만 비슷한 처지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공예품과 기념품들이 가득 진열된 이동식 점포의 가면들은 자신의 텅 빈 눈동자를 채워 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축제가 끝난 노점은 한가했다. 사람들은 무심히 스쳐 지나갔고, 빈 눈동자의 가면들은 아무에게도 선택되지 못하는 욕망의 결핍을 저 혼자 삭히고 있어야 했다.
가진 것 없는 나(영진)는 청주에서 여상을 졸업하자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 등록금을 벌기로 결심하고 혼자 상경한다.
담임인 상업 선생을 통해 작은 무역회사 경리직을 얻은 뒤, 석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상여금을 어머니 계좌로 송금하는 것 외에는 알뜰히 적금을 부었고,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희망을 움켜쥐고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4년 가까이 부은 적금이 만기가 되어가고 있던 초여름 토요일 오후, 영진은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 상점과 술집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고향 마을에서 샛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앞집에 살던 인숙 언니를 만나,
산동네 월세방을 전전하는 비슷한 처지의 괴로움을 토로하게 된다.
두 사람은 가진 돈을 모았고, 영진이 부족한 돈은 회사에서 빌려, 지하철역이 가까운 반지하 전세방을 얻어 함께 살아간다. 인숙은 연탄가스 중독 사건으로 영진보다 더 심한 후유증에 시달렸고, 유전 때문인지 평소 간까지 좋지 않던 인숙은 건강이 악화될수록 짜증의 강도가 심해졌고, 생각과 행동도 더욱 까칠해졌다.
다음 해, 유난히 바람 끝이 차던 일월 토요일 오후, 영진은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흐트러져 있던 난장판 세간살이를 발견하고, 섬뜩한 예감이 가슴을 훑었다.
인숙은 영진이 보관하고 있던 전세 계약서까지 찾아내, 전세금을 모두 빼낸 후였다.
"나는 나대루, 갑자기 전세금 마련하느라고 빚까지 얻었다우. 계약 기간이 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말이야. 둘이서 급한 사정이 있나 부다 했지. 그때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가씨가 모르는 일일 거라구는 생각두 못했어·······" - 본문 85쪽
주인아주머니는 두 사람이 서로 의논하고 결정한 일로 생각하고, 인숙에게 선선히 전세금을 모두 반납해 버렸다.
암담한 상황에 놓인 영진이 찾아간 곳은 서울에 사는 유일한 친척인 이모의 13층 아파트였다.
욕실이 두 개 딸린 사십이 평의 아파트였지만, 영진이 비집고 들어설 곳은 없었다.
가난한 농군에게 시집와 고생만 한 영진 어머니와 달리 작은 이모는 유망한 중소기업체를 이끌어온 이모부를 만나 평생 가난을 모르고 살아왔다. 성별이 다른 세 명의 사촌 동생들도 각자의 방이 필요했으니, 영진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서 영진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은 파출부 아주머니가 유일했다.
결국, 한 달만 살게 해 달라고 애원했던 영진은 돈을 모으지 못하고 베란다에게 기거하며 계속 눌러살게 된다. 경제적으로 그곳에서 나올 수 없던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던 영진은 천덕스러운 목소리로 웃었으며, 못 말릴 만큼 철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박힐 때까지 태연을 가장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츰 식구들은 내가 으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직장 동료들도 나에게 무척 변했다고 말했으나, 그 변한 모습이 오히려 상대하기에 편한 듯한 기색이었다. 인숙 언니가 충고했던 대로의 내 모습을 만들어놓고 떠났는지도 몰랐다. 10개월에 걸쳐 갚아간 회사의 빚은 삼월부로 간신히 청산되었고, 대학 입학금이라고도 독립자금이라고도 딱히 이름 붙이지 않은 적금을 다시 붓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희망 따위는 없었다. 그 대신 인숙 언니에게서 배운 오기가 나를 버티어주고 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였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 본문 95쪽
영진이 명환을 알게 된 것은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산 지 석 달이 지난 사월 중순이었다.
명환은 영진이 살고 있던 맞은편 동 14층에 살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알고 나서, 그의 집에는 늘 불이 꺼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명환은 불 꺼진 105동 14층에서 영진이 얹혀살고 있던 106동 13층 베란다를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다.
명환은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고 괴로워했다. 교통사고를 낸 젊은 가장은 명환에게 막대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어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양쪽 모두 정신적 타격은 무척 컸다.
그런데 명환은 배상금으로 교통사고 가해자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 14층을 구입하고, 차츰 그 집식구들의 생활을 침범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끔찍하게도 잘 살고 있군. 아주 잘들 살고 있어·······!" - 본문 104쪽
'결국, 그 집식구들은 정든 아파트를 떠나 이사를 갔고, 영진은 명환이 그다음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지 궁금했다. 다시 그들이 사는 집을 알아내 그 옆으로 이사를 할 것인가? 그들의 영혼과 육신이 모두 파산할 때까지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 - 본문 106쪽
다행히도 명환은 그 가족을 따라 이사를 가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진은 맞은편에 늘어선 행인들을 노려보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신호가 켜지자, 사내는 갑자기 생각이 변했는지 뒤돌아서서 거꾸로 도로를 횡단했다. 그리고 영진을 불러 세웠고, 별안간 자신의 아파트를 영진에게 양도하고 싶다며, 받아달란다. 바로 명환이었다.
물론 영진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아파트를 그냥 받을 수 없었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영진은 붓고 있던 적금을 해약하고, 작은 월세방을 구했다.
그리고 매일 몇 가지 짐을 조금씩 새로 구해둔 월세방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기 위해.
영진이 이모 아파트를 떠나던 날,
아파트 화단에서 주름투성이 얼굴을 찡그린 늙은 관리인은 청록색 고무호스로 광장 중앙을 향해 물을 뿌리고 있었고, 영진은 그 광장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큼직한 묶음의 책과 한 묶음의 이부자리를 양손에 들고 어깨에는 세면도구며 속옷가지를 넣은 헝겊 가방을 둘러맨 채였다. 곧이어, 중년 여자들이 두런대는 소리가 영진의 귓전에 꽂혔다.
'머리가 흔적도 없었대요. 핏줄기가 꽃밭까지······· ' '그럼 그 집은 누가 가지는 거유? 일가친척두 없다든데.' '날 때부터 고아였나 보죠?' '원, 날 때부터 고아인 사람도 있답디까······· 부모가 있으니까 태어났겠지.' - 본문 140쪽

명환은 홀로 남겨진 남은 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스스로 삶을 접고, 아내와 딸에게로 갔다.
영진과 명환은 하나의 주체에서 갈라져 나온 분신인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교통사고로 가족을 여윈 명환의 상실감은 이 세상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못했고, 빈곤에서 허덕이던 영진의 경제적 사정은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각기 다른 욕망의 결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먼저 간 가족보다 더 비극적인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고, 남겨진 한 사람은 기본적인 의식주 욕망도 채워가기 힘든 삶을 지탱해 갈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현상 사이의 틈은 가까이 손에 잡힐 듯도 했지만, 까마득히 멀어 보이기도 했다.
명환은 죽었다.
간이 안 좋은 인숙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영진은 뻔뻔하게 한낮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녀는 양손에 보퉁이들을 집어 들고, 어깨에 가방을 둘러멘 채 걸었다.
* 『어둠의 사육제』는 『여수의 사랑』 책에 담긴 2번째 단편소설이다.
한강은 만 23살에서 24살이던, 193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책 속에 담긴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등을 집필했다. 2007년 개정판을 내며 한 번 손을 보았음에도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다시 고치고 다듬어 2018년, 『여수의 사랑』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