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더 머뭇거리고 싶고, 더 쓰고, 더 숨을 불어넣고 싶어 하는 저자
누군가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지시하고, 감정을 느끼고, 함께 울고 웃는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감시한 그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한강은, 짧은 자전적 산문 <<기억의 바깥>>에서 넌지시 이야기한다. '기억의 바깥'에서 서성이던 독자도 평생 나를 집요하게 감시하고 있는 그가 나 스스로였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때로 과거를 골똘히 돌아보려 할 때(자전적인 산문을 써야 하는 지금처럼), 그와 비슷한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다. 한없이 비좁고 기다란 어향의 입구에 한쪽 눈을 대고 있는 것 같다. 그 어항 안에서 움직이는 어둑한 - 때로 놀랍도록 선명한 - 영상들을 나의 기억이라고 불러야 할 테이지만, 그것들이야말로 나의 역사, 내가 경험한 전부임이 분명할 테지만, 어째서인지 곧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진다. - 본문 310쪽
급식비를 내는 대신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가난한 집 아이였으나, 서글픔이나 원한을 느껴보지 않았던 어린 강이는 차갑고 반짝이는 물 같은 '시간'의 감각이 두 손바닥에 늘 고여 있던 아이였다.
배시시 잘 웃던 그 아이 기억 속의 삶은 종으로 횡으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온 가족이 나섰던 여름날 축제 같았던 물청소,
서울로 올라온 열세 살 즈음엔 아버지가 광주에서 구해온 80년 5월 열흘간의 사진집과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던 아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지울 수 없게 되었고,
그즈음 가방에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연필로 줄을 긋거나 베끼기도 하며 읽었던 아이는 그 문장과 그 활자들이, 이따금 눈이나 살갗에도 꾹 박히는 것 같았다.
스물여섯 살 '강'이의 여름, 첫 책을 받아 든 오후에 느낀 감정은 말로 옮기기 힘들 만큼 복잡했다.
증정권으로 받은 '내 책' 다석 권을 가방에 넣고, 한동안 꺼내보지도 못한 채 혼자 카페에서 앉아 있었던 기억까지.
한강은 작가로서 지금까지 쓰고, 쉬고, 쓰고, 때로는 오래 쉬고, 다시 썼던 세월을 살아왔다.
저자처럼 유년과 청춘의 기억을 이렇게 밀도 있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기에, 짧은 산문 한 편에서도 작가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미술관 상설 전시품에서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등신대의 종이 화폭 앞에 선 사람을 마주하고, 지워야 하는 문장과 단어들을 생각하며 이젠 정말 글을 못 쓰려는가 보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의 몸집과 흡사했던 회색 종이 화면에 하나하나 점들을 뚫어 여러 줄의 수평선을 만들었던 전시품을 마주했던 저자는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창작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 사람이 형상에 대해 느끼는 고통은 무슨 고귀한 창작의 진통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피부가 찢어지는 것같이 괴로운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그는 화면을 찢어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나는 그 그림을 이해했다.
문장들과 단어들, 구두점의 날카로운 자국.
약간만 발을 잘못 디뎌도, 아니 잘 디뎠다고 믿은 순간마저 기다리고 있는 구역질의 기미.
지워야 하는 문장들.
단호하게 송곳으로 뚫어, 깨끗이 찢어버려야 하는 단어들.' - 본문 313쪽
평범한 사람들이 취미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창작의 기쁨과 어려움으론 감히 견줄 수 없던, 작가의 고뇌가 그대로 느껴졌다.
한강 작가가 책 속에 글로 묘사한 이 그림을 쳇 gpt에게 그려달라고 요청해 보았다.
https://openai.com/ko-KR/index/chatgpt/
'그 그림의 키는 내 키보다 조금 컸고, 너비는 내가 두 팔을 벌린 정도였다. 사람의 몸집과 흡사한 그 회색 종이 화면에, 화가는 하나하나 점들을 뚫어 여러 줄의 수평선을 만들었다. 심이 굵은 연필이나 펜촉, 아니면 송곳이었을까? 첫 줄과 둘째 줄, 셋째 줄까지는 정교하고 신중하게 하나하나의 점들이 작고 얕게 뚫었다. 아랫줄로 갈수록 점들은 커지고, 수평선이던 선들은 차츰 비뚤어졌다. 나중에는 아예 길게 세로로 찢긴 흔적들이 이어졌다. 점을 뚫어가면 뚫어갈수록 뚫는 사람의 자의식이 강해진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점점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펜촉 또는 송곳을 더 세게 움켜쥐어야 했던 것처럼, 더 거칠게 긋고, 더 깊이 상처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문장에서 표현한 대로 한 장의 그림을 그려줄 수 있으세요?
저자가 위 그림 2장을 보면서, 비슷한 고뇌를 풀어낼지 의문이긴 하지만, 친절한 '쳇'씨가 2장씩이나 그려준 그림이니, 가져와 보았다.
작가가 글로 그린 '찢긴 흔적'이 보이질 않아 아쉬웠고, 내 상상으로 그린 그림과도 너무 달라서 살짝 당황했지만, '쳇'씨도 자기 방식대로의 감상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뭐 다르면 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 역시, 그 다양성과 포용성이 아닐까?
결국 한강은 2011년에 쓴 이 자전적 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감시자, 감시당하는 자도 아니다. 천구백 몇 년도, 어떤 도시들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사물들, 어떤 풍경을 만나고 사랑해 온 사람도 아니다. 몇 권의 초라한 '내 책'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수없이 나는 삶으로부터 구원/버림받는다. 그 구원/버림의 힘으로 계속 등신대의 종이에 점을 뚫는다. 그 행위가 두렵거나 고통스럽다고, 스스로에게조차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 본문 316쪽
여전히 한 편의 소설이 끝나려고 할 때 ······· 언제나 더 머뭇거리고 싶고, 더 쓰고, 더 숨을 불어넣고 싶어 하는 한강 작가는 2024년 드디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지만, 그는 늘 변함없이 반쯤은 은둔의 삶을 나머지 반은 세상과 소통하며 사는 듯 보인다.
그는 늘 더 생각하고,
더 쓰고,
더 자신의 온 힘을 불어넣으며, 스스로 쉬지 않고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 글은 한강의 작품 <<디 에센셜: 한강>> 4부에 담긴 산문 '기억의 바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