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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편] 오브제의 독백: 생수병

by 은퇴설계자

나는 생수병이다.

투명한 몸을 가진,

내용물이 전부인 존재.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에 관한 게 아니다.

이건 그에 대한 이야기다.

뚜껑.

내 처음을 지키던 존재.


우린 처음부터 함께였다.

붙어 나왔고,

붙은 채로 세상에 등장했다.


나는 언제나 열리기 위해 존재했고,

그는 언제나 열리면 사라지는 운명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처음 만질 때,

늘 그를 돌린다.

그가 먼저였다.


찰칵,

그 소리는 처음이자 끝이다.


그 소리가 나고 나면,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옆으로 굴러간다.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가끔은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책상 위에서 굴러가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그를 찾을 수 없다.

나는 그저 비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내 안을 들이키고,

나는 점점 가벼워진다.

마치

그가 떠난 후의 나처럼.


누군가는 말한다.

"뚜껑은 별거 아니야."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없이는

나는 운반되지 못하고,

보존되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했다.


그는 작았지만,

결정적인 존재였다.


단단히 조여진 시간,

잠시도 움직이지 않던 그 손끝.

그건 나의 평온이었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언제나 흔들렸다.

쏟아지거나,

버려지거나,

그도 아니면 비워진 채로

구겨졌다.


가끔은

다시 닫히는 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처음의 그가 아니다.

새로운 뚜껑이거나,

랩을 덮어놓은 응급처치.

그건

우리의 밀착과는 다르다


나는 생수병이다.

마시기 전엔 닫혀 있고

마시고 나면 버려진다.


그는 내 처음을 지켜봤고,

나는 그의 끝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묻는다.


"그 찰칵 소리가 너의 끝이었다면,

나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우린 함께 만들어졌지만,

함께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게 내가 가진 가장 단단한 슬픔이다.

그리고, 가장 투명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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