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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생존투자의 길:욕망의 칼날을 칼집에 넣으며

나는 왜 워렌 버핏이 될 수 없었나

by 은퇴설계자

나는 'ETF 투자로 살아남았다'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이 글을 시작했지만, 사실 이 기록은 '나의 실패기'이자 '성격 개조기'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나는 주식 투자와는 참 맞지 않는 성격을 타고났다.


빨리 수익을 실현하고 싶어 안달하고, 수익을 더 빨리 늘리고 싶은 조급함에 눈이 멀었다. 남들이 좋다는 '동네 풍월'과 근거 없는 '직관'에 의지해, 오를 것 같은 종목에 내 자산을 '몰빵'했다. 그리고 그 종목이 폭락하면 '손절'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하며 좌절의 매도 버튼을 누르곤 했다.


매사에 성격이 급하니, 주식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인 '인내'가 자리 잡을 틈이 없었다.


워렌 버핏과 도박꾼 사이


얼핏 보면 나의 '올인 투자'는 워렌 버핏의 '집중 투자'와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다. 내게는 버핏처럼 기업의 적정 가치를 계산해낼 수 있는 통찰력도, 그 가격이 올 때까지 수년을 기다릴 수 있는 엉덩이의 무게도 없었다.


그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며 감에 의존한 매매였기에, 나의 주식 투자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개별 종목의 널뛰는 변동성을 버텨낼 실력도, 그럴 그릇도 내겐 없었던 것이다.


강제된 구원, 퇴직연금과 ETF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구원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제도였다. 퇴직연금(DC형)으로 투자를 시작하게 된 것은 내 투자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돌파구였다.


퇴직연금 계좌는 개별 주식 투자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덕분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지수를 추종하는 ETF를 살 수밖에 없었다. 1화에서 나는 이것을 '평균의 함정'이라 불렀다. 하지만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지금, 나는 이것을

'평균의 구원'

이라 부르고 싶다.


물론 요즘은 테마형 ETF가 다양해져서 나름대로 엣지(Edge) 있는 투자가 가능하지만, 결국 ETF는 여러 종목을 담고 있기에 한 국가나 산업의 평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성과가 평균에 수렴한다는 것. 이것은 지루함이 아니라 '안전함'이었다.


ETF 투자는 개별 기업의 재무제표를 파고드는 것보다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거시 경제(Macro)의 흐름과 산업의 동향이라는 큰 숲만 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AI라는 시대의 파도 위에서


특히 지금처럼 AI 혁명기를 지나고 있을 때, ETF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승자가 누가 될지 모르는 혼란한 전장에서, 굳이 한 명의 장수에게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


미국 전체에 걸고 싶다면 S&P 500

기술의 혁신에 걸고 싶다면 나스닥 100

빅테크 승자들에게 집중하고 싶다면 미국테크 Top 10


더 세밀하게는 반도체, 전력 인프라, 양자컴퓨팅, 데이터센터까지. AI가 불러올 미래에 올라탈 수 있는 티켓은 많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테크 자이언트들이 만들어내는 우상향의 파도, 나는 그 위에 얹혀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욕망의 칼날을 칼집에 넣다


지난 시간, AI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장이 상승하는 동안 시장에 머물러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 행운 속에서도 테슬라 레버리지 몰빵이라는 욕망의 굿판을 벌이며 하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사서 했지만, 그 덕분에 나의 투자 습관을 뼈저리게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은 남들보다 더 큰 초과 수익(Alpha)을 내고 싶어 귀가 펄럭거린다. 욕망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현금 보유 원칙을 지키고, 시스템으로 나를 통제할 때만이 이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은퇴 이후 나의 삶은 '투자'와 '글쓰기'가 중심이 될 것이다. 투자의 눈으로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일. 이것은 늙지 않는 지적 유희이자 훌륭한 일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한다. 한 몫 단단히 잡아보겠다는 욕망의 시퍼런 칼날은 이제 칼집에 넣어 잠그기로. 대신 평균보다 아주 조금만 더 나은 수익을 목표로, 아주 오랫동안 이 투자의 길을 걷기로 말이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생존 투자'의 길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svf2z4svf2z4svf2.png image By 제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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