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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노릇 ep.6

by 이재이




의사의 시선은 떨리는 A의 손끝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이내 금속테 안경을 한번 쓸어 올리고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환자분께서 집에서 큰 캔버스를 찢고, 물감을 던지는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혼란스럽고 파괴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심리적 긴장을 해소하고 고통을 다루기 위한 자기방어기제이자, 최후의 수단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술 활동은 감정을 표출하고 내면의 갈등을 직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치료적 도구입니다. 특히 환자분처럼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서적 고립 속에 있을 때,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는 내면의 억압된 감정을 분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캔버스에 대한 집착과 격렬한 표현은, 어쩌면 그녀가 정신적 고통을 견디며 버티는 방식인 셈이죠."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그 행위가, 최후의 수단이자 그녀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니. 의사는 얼이 빠진듯한 내 표정을 보고 덧붙였다.

"쉽게 말해,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미친 짓'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입니다."

나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근데……이 사람이요. A는요. 저한테 계속 화냈어요. 늘 날 몰아붙였다고요. 제가 뭘 해도 자꾸……."

목소리가 갈라졌다. 의자에 기대려 했지만, 중심을 잃을 것 같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나를 덮쳐왔다.

"A가, A가……날 탓했단 말이에요. 제가 뭔가 잘못했다고 계속……계속 그러니까, 제가……."

그제야 의사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감정의 기억이 실제 상황과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편집적 사고에서는 감정의 해석이 현실보다 우선합니다. 기억 속의 분노와 모욕감이 현실보다 더 강하게 남고, 그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황을 조각내어 재해석하게 되죠."

그는 A에게 조용히 시선을 옮겼다.

"그동안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 지켜보는 사람의 고통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A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 했을 뿐.


환자는 A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마치 바닥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딛고 있는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단 몇 초도. 어쩌면 오래전부터 균열은 있었고, 나는 그 균열을 애써 부정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 균열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두려워 자꾸 타인에게서, 심지어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있지도 않은 그 실마리를 찾아내려 애를 썼는지도.

내가 A를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던 모든 순간들이, 실은 그녀가 나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려 애쓴 시간이었단 말인가. 그녀는 내가 현실을 오해하고, 말과 행동을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믿는 동안 조용히 내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인데. 그저 그랬을 뿐인데.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적 소란, ‘미칠 노릇’이라 느꼈던 순간들, 그 시간들이 모두 내 안에서 만들어진 허상과 두려움의 결과란 말인가.


나는 누구였을까.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를 미워했으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진짜였던 걸까. 그 날 진료실에서 무너진 건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세계를 부여잡고 끝까지 버티려 했던 나는 지금 혼자 이렇게 카오스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다.


진료실 안은 숨막히도록 조용했다. 나는 벽의 흰 커튼을 바라보다 머릿속까지 하얗게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 됐든, 많이 힘드셨죠? 지금도 물론 힘드시고요."

적막을 깬 건 다시 의사의 목소리였다.

그때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던 A가 마침내 입을 떼었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진료실에 낮게 울렸다.




“미칠 노릇입니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