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칠노릇 ep.5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의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는 너무 반가웠다. 역시 전문가는 내 고충을 알아 준다니까. '그러니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그를 바라봤는데, 의사의 시선은 나를 완벽히 통과해 A를 향하고 있었다.
A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보호자 입장에서 정말 많은 부담이 있었을 거예요. 환자분이 현실 인식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일 경우, 관계 안에서 상당히 왜곡된 갈등이 반복되거든요.”
그 순간, 의사가 어떤 ‘환자’를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알아차리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었다.
"환자분은 현재 편집성 성격장애 소견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환자분'이라는 그 단어 하나가 유리잔처럼 깨져 가슴에 박혔다. 그 단어가 나를 지칭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내 상태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는 차트를 들춰보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어조는 담담했고, 문장은 명료했다.
“이 성격장애는 오랜 기간에 걸쳐 타인을 과도하게 의심하거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위협을 과장되게 인식하는 경향이 특징입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신뢰 대 배신’의 구도로 해석하려 하고, 사소한 실수나 오해를 명백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죠. 특히 일상적인 갈등을 '의도된 공격'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감정 표현이나 피드백조차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지속하게 되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의사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내 귀에는 고장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지지직 거리며 흘러갔지만, 이상하게도 그 하나하나가 정확한 주파수로 나를 향해 꽂히는 듯했다.
“특히 환자분의 진술에는 반복적인 피해의식과 과잉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A씨의 일상적인 지적이나 감정 표현을 ‘히스테리’로 규정하고, 반복적으로 ‘자신은 침착한데 상대는 비이성적이다’는 진술이 반복됩니다. 이는 편집적 성향이 강한 분들이 흔히 보이는 '자기 방어형 인식 구조'입니다."
A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또 관찰된 바로는, 상대방의 사소한 실수나 중립적인 행동조차도 고의성으로 해석하는 '과잉 해석'이 강합니다. 예컨대 물감이 튄 흔적, 테이블에 남은 커피자국 같은 아주 일상적인 사건들조차 의도적인 무례, 공격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면서 깊은 불쾌감과 수치심으로 연결되고, 그 감정이 오히려 현실보다 더 우선합니다. 이것은 피해망상적 사고의 한 양상이며, 현재로선 '망상장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뭔가 말하고 싶었다.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환자분은 상대의 감정 변화나 의견 표현을 통제 불가능한 위협으로 느끼고, 그 결과로 감정적 고립과 현실 왜곡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특히 사랑이나 신뢰라는 개념조차 의심과 불신 속에서 해석되기 때문에, 동거 중인 A씨와의 관계에서 극심한 오해와 충돌이 계속돼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환자분’이라는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파도에 모래성이 무너지듯 가슴 언저리에서 무엇인가가 조용히 스러졌다.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의사는 A의 표정을 살피는가 싶더니 다시 차트를 정리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가장 힘든 사람은 환자 본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편집적 사고를 가진 분들은 대부분 자신이 병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프다고 느끼지 않죠. 대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까운 보호자가 극심한 정서적 고통을 겪습니다.
매일 감정을 조율하고, 공격적인 말에도 반응하지 않으려 애쓰고, 상식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 상태를 견뎌내며 곁에 머문다는 건……생각보다 훨씬 소모적인 일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이를 '정서적 소진'이라고 부릅니다.
지속적인 피해망상과 해석 편향, 그리고 타인에 대한 과도한 불신이 누적되면서 관계에서의 지속적인 충돌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보호자인 A씨 역시 현재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한 소진 상태를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의사는 다시 설명을 이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A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