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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표류자 Sep 12. 2023

아기 단풍잎

[5주차] 2023년 4월 3일

만물이 움트는 봄이 오고, 흑백 화면에 갇혀 있던 나무도 색깔을 갖게 되었다. 이제 멀리서 보아도 제법 붉은 기가 돈다. 나무가 붉은 색으로 탈바꿈하면서, 가지들 사이로 불규칙하게 쳐져 있던 거미줄도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잔가지가 군데군데 뻗어 있어 원래도 여러 방향으로 향해 있던 나무는, 가지 끝마다 한두 개의 작은 잎을 내면서 더욱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붉은 빛을 사방팔방에 비추려는 것 같았다. 잎이 필 자리를 자세히 보니 씨앗처럼 생긴 무언가가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저 씨앗은 나무에게 무엇을 주려고 저 자리에 있을지, 꽃이 피어날 자리는 아닐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흔히 아는 단풍잎의 모양은 일곱 갈래로 나뉘어 사방으로 길게 뻗은 어른 단풍잎의 모양이다. 오늘 나무를 보고 나니 어른 단풍잎이 되기 전 아기 단풍잎의 모습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졌다.


초등학교 때 학교 뒷산으로 체험학습을 가면 단풍잎 몇 잎을 주워 와 교과서 사이에 끼워서 말리곤 했다. 그 시절의 내가 가장 좋아했던 새빨간 아기 단풍잎의 모양이 떠올랐다. 그것은 갓난 아기의 손처럼 작고 부서지기 쉬워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그 여린 손에서도 가장 여린 부분은 바로 손끝이었다.


단풍잎이 피기 전의 모양을 오늘 처음 보았다. 오늘 내가 본 단풍잎은 그 여리디여린 손끝을 고요히 오므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얇고 복실복실한 털이 자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이 아직 펴지 못한 갓난 아기의 손끝 같았다.


나는 느꼈다. 너무 여려 아직 세상 밖에 나오지 못하는, 동시에 얼른 자라서 세상 밖의 공기와 닿기를 바라는 아기 단풍잎의 마음을.


이제 나무는 오랜 공을 들여 제 잎을 충분히 길러내면서, 아기 단풍잎의 손끝이 바람에 다치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자라날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여름을 앞둔 어느 따스한 봄날,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는 듯 모든 이파리들을 세상 밖에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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