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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표류자 Oct 11. 2023

나무 속이기

[13주차] 2023년 5월 29일

한낮의 태양에 따수워진 바람이 나무를 차분히 흔든다. 봄바람이 나무를 사방으로 흔들고 나무가 바람의 리듬을 온몸으로 따라가던 계절은 어느덧 제 소명을 다한 듯하다. 바람은 나무 주변으로 다가와 나무를 살짝 흔들고는 멀리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나무를 흔들고는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무는 제 곁으로 바람이 찾아올 때마다 위아래로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바람의 부름에 답하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나무와 바람이 다정하게 주고받는 인사 같다. 나무를 이리저리 한참 흔들다 소리 없이 떠나는 바람을 보고 있자니, 짓궂게 장난 치고 멀리 도망가버리는 수줍은 아이의 모습이 어렴풋하다.


나무와 바람의 다정한 춤을 바라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다. 나도 한 번 바람을 따라해 볼까? 나도 바람처럼 나무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고 싶다. 그러면 나무는 내가 바람이라고 생각할까? 나무를 속여보고 싶다. 일주일에 한 번 나무를 보러 오는 인간이 아닌 '바람'으로 나무에게 다가가고 싶다.


손가락을 뻗어 가지 한 쪽에 조심스레 얹고, 최대한 느리고 부드럽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바람의 움직임을 따라해 본다. 나무는 내 손의 사뿐한 움직임을 따라 이파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좀 전에 바람의 부름에 답하던 나무의 움직임과 다르지 않다. 나무는 내가 바람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나무 속이기’에 성공한 것일까?


나무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곱씹어본다. 나는 왜 나무를 속이려 했을까? 나는 왜 나무에게 바람인 척하고 싶었을까? 바람이 되어 나무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그 마음은, 실은 나무와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는 바람에 대한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떻게든 나무와 가까워지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한순간 나무를 속여서라도 나무에게 다정한 친구가 되어보고 싶었나 보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나무에게 아직 낯선 존재이기에, 나는 나무에게 가장 친숙한 바람의 방식을 빌려 나무와 가까워지고자 했다. 나무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무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무와 나 사이의 거리를 조금 좁혀놓았다. 나는 내 나무를 이만큼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나무를 위해 잠시나마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 만큼, 나는 내 나무를 배려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홍단풍은 5월에 꽃을 피운다고 했는데, 내 나무는 아직인가? 햇빛을 잘 받은 몇몇 이파리들의 손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설마 꽃을 피울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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