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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표류자 Oct 04. 2023

내가 널 키웠다

[11주차] 2023년 5월 15일

나무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시선을 빼앗아 간 것은 나무가 아닌 나무 밑의 민들레들이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한두 송이 정도가 전부였는데,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높이 뻗은 줄기와 새로 피어난 꽃들이 눈에 띄었다.


민들레들은 어떻게 자라날 수 있었을까? 민들레들이 꽃을 피우게 된 과정이 궁금해져, 나는 잠시 나무의 마음이 되어보기로 했다. 찬바람이 따스한 햇볕에 조금씩 제 자리를 내어주며 겨울이 봄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나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민들레들에게도 꽃을 피워야 할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들레들에게 자신의 생을 기꺼이 베풀고자 했을 것이다. 그건 나무의 필연적인 본능이었거나, 다른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려는 숭고한 마음이었거나, 홀로 꽃을 피우면 한 계절 내내 심심하고 외로울 것을 걱정하여 다른 존재들과 함께 꽃피우고 싶어 한 작은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나무는 자신이 토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양분의 일부를 민들레들의 몫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성장 속도를 늦추는 만큼 민들레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그들과 함께 꽃을 피우고자 싶어 했을 것이다.


나무의 시선에서 바라보니, 결국 민들레들은 나무가 키워낸 존재들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 가까이 노랗게 꽃을 피운 민들레들에게, '내가 널 키웠다' 하며 흐뭇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나무 주변에 자라고 있는 다른 나무들도 나의 나무와 같은 생각을 하며 민들레들을 길러냈을 것을 생각하니, 나무가 자라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생(生)'의 주고받음이 느껴진다. 땅의 생을 빌려 자라나는 나의 나무가 땅에 대한 보답으로 민들레들에게 자신의 생을 빌려주듯, 이 땅 위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에 대한 암묵적인 보답으로 생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과 생이 얽히고 설킨 하나의 거대한 힘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느꼈다.


민들레를 키워내는 방법을 잘 아는 걸 보면, 내 나무는 민들레가 자신에게 생명을 빚지게 된 것과 같이 자신의 존재도 땅에게 빚지고 있음을 아는 것 같다. 나무를 낳은 땅도 나무를 향해 '내가 널 키웠다' 하며 흡족해하고 있을까? 나무와 땅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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