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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표류자 Sep 27. 2023

이끼

[9주차] 2023년 5월 1일

운이 나쁜 날이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우산을 펴는 순간 그만 물웅덩이에 발을 헛디뎠다. 바지 밑단이 내 기분만큼 무겁게 축 늘어졌다. 물에 젖는 것은 언제나 어색하고 불쾌한 감각이었다. 우산 속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좁은 보폭으로 주춤거리며 걸었다. 걸음마다 찰박거리며 낮게 튀어오르는 물방울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아스팔트 도로 위 첨벙첨벙 굴러가는 차 바퀴 소리가 잦아들고, 빗소리만 고요히 남아 정신이 아득해졌다.


문득, 오늘 같이 갑자기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하는 수 없이 비가 그칠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을지도, 혹은 어쩌면 비를 잔뜩 맞아 온몸이 빗줄기와 함께 땅으로 서서히 가라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찰나, 우산이 있어도 우산을 쓰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마음을 건드렸다. 생각해보니 여태껏 비 오는 날 중에 나무를 만난 날이 하루도 없었다. 우산이 있는 나도 이렇게 젖었는데, 우산이 없는 나무는 물에 빠진 생쥐마냥 홀딱 젖어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우산이 있어도 혼자서는 우산을 쓰지 못하니, 내가 가서 대신 씌워주기라도 해야 하나. 비를 다 맞고 있을 나무가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나무는 이미 온몸에 물을 머금은 채 검은 나무로 변해 있었다. 정말이지 빈틈없이 검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나무의 몸에 온통 새까만 발자취를 남기고 간 모습이었다. 우산이 없으면 꼼짝 못할 뿐더러 물웅덩이 하나에도 잔뜩 웅크리는 나약한 나와 달리, 나무는 있는 대로 몸을 뻗고 내밀어비를 반갑게 맞이하는, 역시나 나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다.


검어진 나무를 가까이에서 마주하자 초록색 이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나무와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이끼임을 깨달은 첫 순간이었다. 날이 맑으나 흐리나 늘 나무 곁에 있는 이끼는 무척이나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아마 나무에게 친구가 되어준 최초의 존재도 바로 이끼였을 것이다. 나는 오늘로서 나무의 오랜 친구를 하나 더 알게 된 셈이었다.


구석구석 빽빽하게 끼어 있는 이끼의 모양이 귀여워서 더 가까이 다가가 이끼의 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음이 애석했다. 이끼 대신 나뭇잎의 소리를 듣고자 내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이파리들 곁에 귀를 갖다대었다. 빗방울이 경쾌한 톡 소리를 내며 잎 위에 자리하는 순간, 잎은 파르르 진동하다가 끝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빗방울을 땅으로 떨구었다. 그렇게 무수한 빗방울들이 잎에 잠시 머물렀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엔 나무에 붙은 이끼를 천천히 쓰다듬어 보았다. 이끼의 촉감은 생각보다 훨씬 보드라웠다. 이렇게나 작고 귀여운 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보금자리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이끼를 만지는 나는 나무가 흘린 빗물을 닦아주는 것 같기도, 비바람에 추위를 타는 나무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끼들은 나무에게 세상에 딱 하나뿐인 옷을 입혀준다. 나무도 이끼 옷이 마음에 드는지, 빗방울을 한껏 머금어 몸을 더욱 검게 만들면서 이끼 옷을 세상에 뽐낸다.


나도 나무처럼 비 오는 날에 이끼 옷을 입고 싶다. 내 살에서도 나무처럼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나무처럼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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