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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표류자 Oct 13. 2023

조용한 선물

[14주차 - 마지막] 2023년 6월 5일

나무를 처음 알게 된 그날로 잠시 돌아가본다. 그날 나는 이 문장으로 나무보고서를 마쳤다. “이번 학기가 내게 '나무를 눈에 담는 여유를 배운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말에는 이번 학기만큼은 부디 여유를 갖고 살아갔으면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나무를 눈에 담는 여유’라는 말은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나는 여유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유 같은 것은 사치라 여기며 늘상 바쁘게 지내는 것을 즐겼다. 그런 나에게 여유라니, 그것도 나무를 보는 여유라니. 나는 나무 관찰이라는 행위에 매주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과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나무가 ‘나의’ 나무가 되었다는 사실도 한동안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무를 보고 글을 쓰는 13주의 시간을 거치며, 나는 나무가 살아가는 세계를 점차 확장해갔다. 어느 순간 나무가 홀로 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나무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존재들을 하나하나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관목, 나무를 스치고 가는 바람, 나무가 길러내는 민들레. 모두 나무와 함께 살아가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나무의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내가 아직 알아채지 못한, 혹은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 다른 존재들도 있을 것이다. 나무를 세 달이나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얼마나 커다란 세계 속에 살고 있을까? 그 세계에는 처음과 끝이 있을까? 그 세계 안에서 생명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또 얼마나 다정하게 서로를 지키고 감싸고 품고 있을까?


돌아보면 이번 학기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에게도 버거울 만큼 변화가 많은 시간이었다. 숨이 턱 막히고 눈 앞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을 만큼 무너졌던 순간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미친 듯이 가슴 뛰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많이 변했다. 나는 이렇게나 변했는데, 나는 나무를 처음 만난 그날과 너무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데,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무는 시간의 흐름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듯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있어주었다. 나무의 변함없음은 시시각각 변하는 나에게 자주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나무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나에게 잠깐의 여유를 선물해주는 나무에게 고마운 마음에 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이 뭉클해지는 날들도 많았다.


한 학기를 돌아보며 글을 써내려가다보니 나무보다는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나무를 보는 것은 결국 나를 알아가는 길이었음을, 그리고 그 길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무를 보게 될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두 눈은 자연을 향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히 자기 자신을 본다. 자연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한다. 나무와 보낸 시간의 끝에서, 나는 이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임을 알았다.


나는 나무를 거울 삼아 나의 세계를 지었다. 내가 나의 세계를 조금 허물고 조금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무는 나의 세계가 언젠가 완성되기를 소망하며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인간은 자연을 거울 삼아 자신의 세계를 짓는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조금 허물고 조금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동안, 자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다. 자연은 인간의 세계가 언젠가 완성되기를 소망하며 조용히 기다려 준다.


나무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나는 나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아 줄곧 나무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나무도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테지만, 나무는 나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그 자리에 있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나무는 나에게 매주 다른 선물을 건넸다. 어떤 날은 나무를 그리워하는 나를, 어떤 날은 나무를 모르고 지내온 지난 날들을 떠올리는 나를, 또 어떤 날은 헤어짐이 아쉬워 나무 앞을 떠나기 싫어하는 나를 마주하게 했다. 그 마주함들은 하나같이 다듬어지지 않아 서툴렀다. 그러나 예쁜 포장지에 싸여 있어야만 선물이 아니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이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자연이 지닌 거대한 힘임을 느낀다.


이제 나무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더 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유한함과 나약함은 나무가 가진 거대한 힘에 보답하기에는 언제나 부족할 것이기에. 그저 자연이 가진 힘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간이 자연의 힘에 예의를 다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나의 나무가 가진 거대한 힘에 순응하기 위해, 나무가 내게 말없이 건네는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나무를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나무에 대해 생각하고, 나무를 보는 나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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