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Oct 29. 2023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산다

고3 담임선생님의 가르침

수능이 1년 좀 안 되게 남은 겨울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내 몸은 의자와 한몸이 되어 미동도 없이 문제를 풀어 재끼고 있었다. 교실 안 공기는 따듯하게 데워져서 규칙 없는 글자의 춤 위로 열심히 졸음을 쏟아내는데, 머리는 운동장에 내려앉은 겨울 공기만치 차갑다. 다른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당최 불가능한 날들이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또 왜 살아야 하나. 가뜩이나 쉬기를 거부하는 머리는 점점 바빠지고 나빠지다가 살아 있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절망에 쫓겨서 겨우 붙잡는 것은 더 큰 절망이고, 그렇게 또 다른 절망을 향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도망치기를 도무지 멈출 수 없는 날들이었다. 얼어붙은 세계에 갇혀 묵묵히 도망치며, 숨을 몰아 쉬며 살아가야 하는, 그런 삶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는 날들이었다.


선배들이 교실을 다 비우고 학교를 완전히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억 속의 그날은 반 배정 결과가 발표되고 3학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순간만은 오지 않기를 한 달 내내 바랐었는데.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나만 혼자 여기에 남아 있을 수는 없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방 안에 책들을 있는 대로 쑤셔담고 남은 책들은 양손 가득 들었다. 그 교실이 오래된 교실이 되는 것이 슬프지는 않았다. (작별의 슬픔은 늘 작별의 순간이 지나야 찾아오는 법이므로.) 그냥 낯선 교실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죽도록 싫었을 뿐이었다. 새해가 밝으려면 아직 며칠 남았는데, 왜 벌써 3학년인 척을 해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그 순간에도 나는 딱 1년 전으로 돌아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로 돌아가면 나는 정말 더 잘 살 수 있는데, 세상은 왜 내가 정말 필요로 할 때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지 불만이었다. 나를 빈틈 없이 다 아는 초월적 존재가 어딘가에 있다면 이만큼 간절한 아쉬움은 한 번쯤 들어줄 법도 한데.


어색하고도 형식적인 첫 인사를 가벼이 나눈 후, 선생님께서는 칠판에 낯선 문장을 적으셨다. 그리고 앞으로의 1년 동안 이 말을 꼭 기억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산다.'


그 문장은 내 안의 어딘가를 분명하게 건드렸다. 일단 스터디플래너에 옮겨놓고, 그 한 문장을 머릿속에 굴리며 그 의미를 천천히 생각했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는가? 나에게 '오늘'을 살았던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그 시절의 '오늘'을 살기 위해 노력한 2019년의 나는, 인생에서 가장 나다운 나이자 가장 아름다운 나였다. 그때의 나는, 말하자면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내가 가장 완벽하게 합치된 나였다.


그 문장 덕에 나는 하루 24시간이 버거운 시절을 견뎌내고 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그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쉬이 망각할 수 있었고, 망각한 순간 그것이 나에게 고통인지 아닌지, 또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 나에게 고통인지 따위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그 문장을 생각한다. 행복이 그리울 때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는 사진-기억으로 보관하여 기억하고 싶은 날이나, 먼 길을 내다 봄에 지쳐 스스로를 포기의 감옥 안에 가두는 날이나, 내가 변함없이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임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살아야 한다. 고로 사람의 생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생의 현재성은 제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 앞에 놓인 존재를 존재하게 하며,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사람은 변함없이 늘 오늘을 살기에 생의 소중함을 알고, 생의 소중함을 알기에 온갖 것에 기뻐하고 아파하며 자기 생을 꾸린다. 기쁨과 아픔을 오가며 결코 끊어지지 않는 무한한 선으로 자기 생을 그려간다.


놓치고 싶지 않은 환희의 순간도, 얼른 지나가버리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순간도, 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순간이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아무리 먼 미래라도 좋으니 지금보다 더 나은 어느 날로 날아가기만을 바라는 순간에도, 사람은 오늘을 산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모두 똑같이 오늘을 산다 - 그 생김새는 제법 다를지라도. 나의 짧은 생 가운데에도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은 다 기억할 수조차 없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쉼 없이 움직이며 어제의 나보다 조금씩 더 나다워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길고 긴 입시에도 끝은 있었고, 겨울은 돌아왔다. 대학 입학을 앞둔 1월의 어느 날,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갔다. 발이 닿는 데를 따라가 나를 키워준 자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다 괜히 아쉬운 척 철제사물함을 한 번 열었다 닫아보고, 창 너머로 산도 한 번 내다보고, 텅 빈 복도도 끝부터 끝까지 걸어보았다. 교실 문을 닫고 나와 교무실에 가서 담임선생님께 마음을 담은 편지 하나 드렸다. 편지에는 선생님의 그 문장이 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그리고 훗날에도 지금처럼 나다운 내가 되어가며 살겠다는 다짐에 대해 썼다.


2019년의 겨울, 첫 진학상담 날 선생님 앞에서 울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 쏟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2020년의 겨울, 졸업식 날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해서 울었다. 비로소 내가 나로서 당당해졌음을, 부끄럼 없이 세상에 나아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았기에 쏟은 눈물이었다. 두 개의 눈물을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오늘'을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