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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타 Jun 08. 2024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숙제하는 날

때로는 재미없는 경험도 세월을 입는다.

국민학교(!)에 입학 후 첫 수업은 야외수업이었다. 어쩌면 첫 수업이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에는 첫 수업으로 기억되는 날. 교실 밖 운동장에 설치된 놀이기구의 이름을 배웠다.


선생님이 놀이기구의 이름을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적어보라고 하셨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든 교육시스템이지만 모래 위에다가 손가락으로 뺑뺑이, 미끄럼틀, 늑목 등의 이름을 적는 것이다. 내 이름만 겨우 쓰고 들어갔던 나는 슬쩍슬쩍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쓰는가 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커닝'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감히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썼는지 엿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그때부터 자기 검열은 시작이었는지도.)


그렇게 이상한 야외수업은 마무리되고 교실에 앉아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교과목은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이렇게 세 과목이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적혀 있던 모든 문장을 따라 읽고 각 문장에 동그라미 번호를 붙였다. 수업시간에 번호가 부여받은(!) 문장들은 그날의 숙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1번 문장, 철수야 안녕> 에서부터 <60번 문장, 영희는 숙제를 했습니다> 문장까지 백번씩  쓰기~! 이런 것들이 매일의 숙제였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하고 짧은 문장이라 별 것 아닌 숙제였지만 제대로 한글도 배우지 못하고 들어간 7돌의 에게는 참 버거운 숙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부모님이 숙제를 봐주시면 그제야 부랴부랴 숙제를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힘들게 숙제를 마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슬기로운 생활과 즐거운 생활 숙제도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온 가족이 제시간에 숙제를 마치지 못한 나를 위해서 연필을 쥐고 부지런히 글자를 노트에 옮겨 적어야 했다. 아마도 각각의 글씨체가 달랐겠지만 7돌의 나는 당연히 그런 눈치가 있을 리 없었다. 일단 숙제를 마치는 것이 아주 중대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엄청나게 재미없는 경험들도 즐겁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 세월의 힘을 입는 것이다. 내게는 국민학교 입학 후 처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기억이 그렇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배우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한글을 배울 수 있게 단순한 방법을 고안해 내신 당시의 담임선생님을 존경한다. 단지 온 가족이 열심히 베껴쓰기만 했는데 한글을 배웠으니까!





© doctype,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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