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식을 때, 마음은 조용히 이사를 시작한다
관계의 끝은 싸움으로 오지 않았다.
그저 고마웠던 사람이 낯설어지고,
따뜻했던 곳에서 차가운 공기가 불어왔다.
그때 마음은 이미, 다음 계절로 건너가고 있었다.
이사 박스가 하나둘 방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떠날 준비를 하는 집인데, 웃음소리가 여전히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단풍이 들기 시작한 산이 보였다.
아침마다 바라보던 그 풍경이,
그날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정말 낯설게, 아무 일도 없는데 마음이 식어 있었다.
그즈음, 옆집에서 경비실을 통해 연락이 왔다.
복도에 아이 물건들이 놓여 있어 불편하다는 민원이란다.
그 말 자체는 충분히 이해됐다.
하지만 그분들은, 처음 이사 왔을 때
“요즘은 아이들 소리 들리기 힘든데,
덕분에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라며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줬던 사람들이었다.
그 마음이 변했다는 사실보다,
그 말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게 더 서늘했다.
겉으로는 “괜찮다”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불편했을 그 시간들.
그 믿음의 틈이 가장 아팠다.
며칠 뒤, 아래층에서도 신호가 왔다.
우리 아이들이 뛰면 천장을 향해 ‘쿵쿵쿵’
막대기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엔 한 달에 한 번이던 소리가
요즘엔 하루에도 여러 번 들렸다.
“이제 진짜 불편하신가 보다.”
이해하려 했지만,
그 쿵쿵거림이 마음까지 울렸다.
가까웠던 이웃들의 온기가 식어가며
나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미안함과 섭섭함이 뒤섞여
말 한마디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다.
정이 식는 건 그런 식이었다.
사건이라 부를 것도 없지만,
그 사소한 일들이 내 마음의 문을 닫게 했다.
그날, 아이가 물었다.
“엄마, 우리 이사 가면 이 놀이터는 어떻게 돼?”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이제 다른 친구들이 놀겠지.”
그 순간 알았다.
이곳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떠나 있었다는 걸.
정이 식은 게 아니라,
머물렀던 시간의 온도가 제자리를 찾아간 거였다.
떠남은 결심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어느 날 문득,
같은 풍경이 다르게 들리고 보일 때,
그때 마음은 이미 다음 계절로 건너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