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올리다

처음 골프장에 들어서고 티 박스에 올랐을 때, 사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by jim

벌써 몇 년이 훌쩍 지난 때의 이야기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몇 개월 단위로 짤막한 연수나, 업무 등으로 그쪽에서 제공해주는 숙식과 일과대로 지냈던 적은 있었지만, 알아서 거처를 구하고, 알아서 다니는, 소위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냥 짧지 않은 시간이니까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챙겨갔던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학업을 따라가지 못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전공분야 관련 서적들도 챙겨가고, 왠지 미국에서는 더 탈 일이 많을 것 같아 스케이트 보드도 챙겨갔었죠. 실제로 평지로 되어있는 동네여서 여기저기 마실 다닐 때 요긴하게 타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무슨 생각이었던 것인지 골프클럽을 챙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때로부터 근 10년 전에 남들이 배워두면 좋을 것이라고 해서 저와 아내가 퇴근 후에 연습장을 두어 달 다닌 적이 있습니다. 시골 동네 작은 연습장이어서 프로님이라기보다는 사장님이 간단간단한 것들만 봐주시는 정도였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레슨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레슨을 받고 또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아무래도 골프채가 없어서 막상 나갈 기회가 없는 것 같다고 하더니, 클럽 브랜드도 모르는 아주머니께서 덜컥 소셜커머스에서 풀세트를 구매하셨습니다. 지금 보면 브랜드도 뭔지 잘 모르겠는 이런 채를 시타 한번 없이 어떻게 그렇게 호기롭게 샀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저는 이런저런 업무가 바쁘던 시기여서 따로 클럽을 구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클럽 풀세트는 비닐도 뜯지 않은 채 또 몇 년간 베란다에 서 있었죠.


그 골프채를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왠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죠. 당시만 하더라도 골프의 규칙도 모르고, 그냥 어설픈 스윙만 배워둔 상태였죠. 그냥 둘이 나가볼 수 있다 하더라도 게임 진행이 불가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약부터, 인원 구성, 예절, 준비물 등등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골프의 문턱은 마치 만리장성 마냥 높아 보였습니다. 저는 챙겨갈 짐도 많은데 가방 하나를 포기하고 이걸 굳이 가져가야겠냐고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위탁화물은 티켓 별로 할당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도착을 하고, 학교에 등록을 마치고, 자동차 한 대를 장만하고, 거처를 마련한 다음 한 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공별로 외국인 학생들의 생활 조기정착을 위해서 현지 학생들 중 자원자들이 도우미 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앤서니라는 저보다 몇 살 어린 친구였는데, 여자 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연애상담, 결혼 준비 과정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편한 관계로 지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그쪽 친구들 볼링장에 끼어서 같이 맥주 한잔 하기도 하고, 해변에 모닥불 피운다고 하면 12캔짜리 작은 맥주 한 박스 들고 가서 어울리기도 했었죠. 뉴욕이나 LA 배경의 미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미국에서의 삶은 엄청 화려하고 복잡해 보였지만, 한적한 미국 해변 마을에서의 삶은 그냥 심심한 소소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앤서니가 묻더군요. 미국에 와서 해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 있냐고 말이죠. 일단 공부를 잘 마무리 지을 것이라고 하고, 짬 내서 남들 다 가보는 그랜드캐년이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도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가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미국 청년들이 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럼 이번 시험을 마치고 자기 여자 친구에게 이야기해서 일정을 맞출 테니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참 순수하고 적극적인 친구였죠.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것이 '바쁘니까 일단 나중에'라는 의미로 통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여행 같은 것 말고 이 동네에서 해보고 싶은 것은 없냐고 또 앤서니가 물었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잘 모르겠고 아내가 골프를 한번 쳐보고 싶어 한다고 대답했죠. 이 적극적인 친구가 또 이번 주말에 코스에 나가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했었는데, 요새 통 골프장에 나갈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죠. 본인이 예약하고 알아볼 테니 주말에 시간만 비워두라고 이야기해주고 그렇게 그날 헤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준비가 안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죠. 뭘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고, 저는 클럽도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크레이그리스트를 훑어보고 아시는 분을 통해 Tommy Armor 200불짜리 중고 클럽세트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골프장에 비용을 지불하면 공이니 소모품들은 다 제공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아마존에 들어가 보니 심지어 가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마존 프라임 빠른 배송으로 그물망에 쌓여 있는 로스트볼을 구매했습니다.


주말이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앤서니가 보내준 주소대로 시간에 맞춰 Bayonet Black Horse라는 코스 클럽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골프채를 어깨에 메고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니, 밖에 두고 들어오라고 배가 이만큼 나온 흰색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웃으며 안내해 주시더군요. 사실 체크인 자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앤서니를 기다렸습니다. 앤서니가 같이 체크인을 하면서 카트 탈 거냐고 물어봤는데, 보통 어떻게 하냐고 제가 되물어봤죠. 운동 목적으로 나온 사람들은 많이들 걷기도 하고, 나이 많으신 분들은 차를 타기도 한다고 하는데, 저는 '골프가 운동이 얼마나 되겠어'라는 생각에 걷기라도 하자고 그냥 걷자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장갑도 없었습니다. 드라이버를 휘두르기 전에 공을 올려두기 위한 티도 없었죠. 부랴부랴 몇 가지를 프로샵에서 구매한 다음 그렇게 골프백을 어깨에 메고 첫 티박스로 향했습니다. 그나마 제가 중고로 산 클럽세트는 한쪽으로 뉘어 세우면 다리가 내려오는 스탠드백이었는데, 아내의 가방은 그냥 캐디백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닐 수도 없었을뿐더러, 그냥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녔던 것도 신기한 노릇이었습니다. 사실 1번 홀 티박스의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근 10년 전 두어 달 레슨 받을 때도 볼이 날아가는 게 보였던 연습장이 아니었고, 당시에는 센서나 시뮬레이터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볼을 맞추기만 하는 수준이었죠. 아마 제일 자신 있는 7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지 않았나 떠올려봅니다.


사실 제대로 맞는 볼이 많지 않았습니다. 한두 개만 제대로 맞아도 환호를 치면서 서로 즐거워했죠. 이리저리 잘못 맞아 사라지는 볼들은 개의치 않고 새로운 볼을 꺼내어 쳤던 것 같고요. 그러고 보면 앤서니가 진행을 잘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 붐비는 골프장은 아니었지만, 워낙 느린 진행 탓에 한 두어 팀 정도는 앤서니가 알아서 먼저 치고 지나가시라고 양보도 했었고 말이죠. 그때는 그냥 제 공 찾아다니기도 정신이 없었을 때라 몰랐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친구의 행동 하나하나가 처음 골프장에 발을 들여놓은 저희, 그리고 앞뒤에서 운동하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배려한 행동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와 골프채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고 하니, 이런 매너가 몸에 배어있었던 것이었을까요.

다들 첫 골프 경험에 대한 추억이 새록새록하실 것입니다. 저와 아내의 경험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어쩌면 태평양 바닷속 첫 스쿠버 다이빙을 하던 그 경험만큼이나 강렬했습니다. 시원하게 펼쳐진 잔디 위에서 새하얀 공을 쫓아가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지르며 유유히 걷는 것 자체가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게다가 중간중간 뛰어노는 사슴 떼, 오리 떼도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죠. 그렇지만 9홀을 마치고 선택의 기로에 빠졌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간단히 음료 한잔 마시고 쉬고 나니, 아내도 그렇고 다시 저 가방을 메고 저기를 걸어 나갈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이죠. 게다가 날씨도 갑자기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오늘은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고 앤서니와 헤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미국이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골프장에서 걷는다, 세 명이서 플레이를 한다, 차도 안 탄다, 캐디도 없다, 9홀만 치고 그냥 피곤하다고 나온다. 친구들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머리 편하게 올렸네, 황제골프를 쳤네 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냥 운동 한게임 편하게 하는 것인데 뭐가 그렇게 복잡해야 하는 것일까요. 머리 올린다고 인사를 드리고,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서로 챙기고. 뭐가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렇게 저와 가족의 비공식(?) 첫 라운딩, 소위 우리말로 머리 올리기는 일단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골프를 그렇게 잘 치지 않습니다. 운동에 소질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승부욕이 크지도 않기 때문에 적당히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같이 어울릴 수 있을 정도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제가 좋아하는 운동이 수영, 달리기, 등반, 다이빙 뭐 이런 것들이겠죠. 여러 사람을 모아야 하지 않는 운동, 신체접촉이 없는 운동 이런 것들 말이죠. 이 골프라는 운동을 시작하고 보니 남들과 같이 하기는 하지만 사실 스스로와 겨루는 운동이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죠.


많은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아주 잘 치는 날이어야 8자가 보이고, 칼같이 스코어를 따지면 90개 언저리를 간신히 치고는 있지만 그래도 소중한 취미로 여기고 있는 골프에 대한 이야기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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