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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애틋한 공기 속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속상한 차이들

사랑

어떤 것도 정확하게 같을 수는 없다.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일년에도 몇 번을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일평생 잊히지 않는 사랑을 가슴 한 켠에 담아두기도 한다. 누구는 절절히 사랑하여 괴로운 반면, 다른 누구는 조촐한 사랑도 받지 못해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어찌 보면 마음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맺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맺어지면 필연적으로 크기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나 싶기도 하다.


뇌수술을 받은 한 환자가 있었다. 헨리 몰래슨이라는 1926년 출생의 미국 사람인데 뇌전증, 예전 용어로는 간질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하던 사람이었다. 헨리는 뇌전증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결국에는 근거가 없는 뇌수술을 받았고, 이후 평생을 기억장애 속에서 살아간다. 수술 후 헨리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 또한 부분적으로만 회상하며 찰나의 순간 속에 갇혀 살게 된다.


당시에는 기억과 관련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터라 뇌수술로 인해 기억이 손상된 헨리는 당연히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고, 실험적 치료로 망가진 헨리의 뇌는 1900년대 후반 뇌과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헨리와 관련된 일화는 루크 디트리치의 자서전적 회고록이자 헨리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환자 H.M.』(동녘사이언스, 2018)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헨리는 수술 이후 평생에 걸쳐 수많은 검사를 받았는데, 특히 학창 시절 중 생각나는 학생이 있냐는 질문에 항상 얼라인 헬리시라는 사람을 떠올렸다.

   “한 명 있어요. 그 학생과 같이 졸업했어요. 그때 그 애 아버지는 경찰이었고, 나중에는 경찰서장이 됐어요. 나중에는 경찰서장이 됐어요. 성이 핼리시였고, 이름은 얼라인이었어요.”

   “한 명 있어요. 여학생이요. 그 애 아버지는, 음, 그때 경찰이었어요…성이 핼리시였어요.”

   “얼라인이요.”

언젠가 얼라인 이야기를 하던 중 핸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교직원들은) 아이들을 골라 다른 반으로 보냈어요. 졸업할 때까지 계속 한 반이 되지 않게 했어요…같이 올라가고 싶은 애들도 있었는데…그런 애들도 다른 반으로 가버렸어요.”

   ‘헨리 몰래슨은 얼라인 핼리시를 짝사랑한 게 분명했다.’[1]


이후 글쓴이는 수소문하여 얼라인을 찾아갔다. 얼라인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기억력에 손상을 주는 끔찍한 뇌수술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부인께서 혹시 제가 쓰고 있는 책의 주인공을 기억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인터뷰할 때 부인을 어렸을 때 친구로 기억했거든요.”

   “누군지 알 거 같아요. 빌 패럴이겠지!”

   “빌 패럴이요? 아닌데요.”

   “오, 아니에요?”

   “헨리 몰래슨이란 남학생입니다.”

   “그런 이름은…글쎄…기억이 안 나는데…”

글쓴이는 헨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설명했다.

   “듣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도 같기도 하고…그 이름, 그 남자애…하지만 정확히 떠오르지 않네요. 나처럼 여든일곱이 되면 그렇게 된다우.”

글쓴이는 다시 한번 핼리시의 기억을 상기시키려고 노력하였고, 핼리시는 긴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젊은이. 그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요. 정말 모르겠군요.”[2]


누군가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가 잘려나가 흐릿해진 세상 속에서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그저 노화로 인해 기억력이 조금 무뎌졌을 뿐인데도 이미지의 흐릿한 조각조차 찾을 수 없는.


애틋한 공기 속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속상한 차이들. 사랑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노래될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 아닐까.




[1] 『환자 H.M.』, 루크 디트리치 지음, 김한영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8, p.69-70


[2] 『환자 H.M.』, 루크 디트리치 지음, 김한영 옮김, 동녘사이언스, 2018, 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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