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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Jul 16. 2021

갈 길을 잃은 환자가 의지할 곳은

보호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누군가 함께 있어준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중학교 때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넘치는 승부욕을 가지고 축구를 하다보면 크고 작은 다툼이 생길 때도 많았다. 한번은 축구 경기 도중 친구와 마찰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씩씩거리며 경기를 마친 후 교실로 올라가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에서 문자메세지 알람이 울렸다. 불만이 있으면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싸우자는 내용이었다. 축구 경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지 그 친구와 주먹질을 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나는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심 무섭기도 하였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그 메세지를 읽고는 "뭔데 이거. 가자"라고 하더니 나를 이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내 친구는 싸움을 부추기기보다는 '축구 경기를 하다가 생긴 다툼 가지고 유치하게 굴지마라'며 문자를 보낸 친구를 나무랐고, 나는 내 친구 덕에 싸움을 내빼며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5년이 지난 일인데도 나는 내 친구를 볼 때면 종종 그때 그 고마운 기분이 떠오를 때가 있다.


병원에도 어려운 순간을 함께 나누는 감사한 사람들이 있다. 보호자들이다. 진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 고통스러운 항암제, 그리고 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수술들. 환자들이 이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참고 병원에 발 디딜 수 있는 건, 그들과 함께 있어주는 보호자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흔히 엄마의 진료를 따라온 딸들을 볼 때면 종종 그러한 생각이 든다. 엄마 뒤에서 가슴 졸이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교수님께서 "다행히 나쁜 덩어리는 아니네요"라고 말씀하시자마자 활짝 웃으며 너무도 좋아하던 그 모습.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짓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그 모습을 그 딸의 엄마도 한번 보았으면 좋겠건만 생각했던 적이 많다. 교수님께 꾸벅 절하며 너무 감사하다고, 우리 엄마 남은 진료도 잘 부탁드린다고 밝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했다.


반면 보호자라고 모두 좋은 모습만 보이는 건 아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의 자녀들이 그렇다. 교수님께서 '치료를 할 순 있지만 얼마나 이득이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고 치료 또한 제법 힘들 것이다'는 말을 건네자마자 그 말을 가로채며 "아버지께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세요"라는 말하는 자녀들. 할아버지는 가뜩이나 귀도 잘 안 들려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은데 강압적인 자녀들에 의해 공격적인 치료로 내몰리게 된다. 표정은 분명 치료를 더이상 받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이와 같이 환자가 사라진 진료실을 볼 때마다 보호자의 존재가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보호자는 감사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불확실함이 가득한 이 병원 속에서, 날카로운 칼과 공격적인 화학 약품들이 용인되는 유일한 공간 속에서, 갈 길을 잃은 환자가 의지할 곳은 그들의 바로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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