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짧은 세월이었다고 하더라도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후에는 괜스레 덧없는 마음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알고 보니 개차반 같은 사람이라 질색하며 헤어졌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본인도 모르게 "그래도 걔가 그거 하나는 괜찮았는데 말이야..."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한다. 인연이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아주 놓아버릴 수가 있겠는가. 저마다 그 비중은 다르겠지만, 좋든 싫든 간에 살아가며 마주한 누군가와의 경험은 내 마음 어느 한 구석에 자리잡아 나의 자아를 구성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너를 보내는 일은 나를 떠나가는 일 수밖에.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의 끝자락에서 의료 집착을 하지 않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누가 보아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자인들, 보호자인들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싫기에, 어쩌면 나를 잃기 싫기에, 우리들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격적으로 항암제를 퍼붓고, 주사기를 찔러대고, 가슴뼈를 부러뜨리면서까지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유달리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다. 죽음은 결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동원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 해 주세요"라는 말은 결코 환자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늘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못다한 말들을 전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건네야 할 시기에 지독한 치료를 받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죽음의 질이 낮은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1
반면 마지막 순간에도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사람도 있다. 한시도 쉴 틈이 없는 대학병원 응급실에 또 한 명의 환자가 실려왔다. 뇌출혈이었다. 중년의 남성이었던 환자는 한 모텔방에서 '악'하고 소리를 지른 후 쓰러졌고, 이에 그 자리에 있던 일행이 119에 신고를 하여 환자는 급히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조금 늦었던걸까, 환자는 기본적인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되찾지 못하였고, 그렇게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참 묘한 것이었다. 환자와 모텔방에 함께 있던 일행은 환자의 부인이 아니라 환자의 내연녀였다. 한창 모텔방에서 은밀한 관계를 가지던 어느 순간, 환자의 혈압은 급격히 올라갔고, 아마도 이전부터 문제가 있었을 환자의 뇌혈관은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터져버리고만 것이다. 어찌 되었든 병원은 보호자인 부인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발견된 위치나 신고한 사람과 같은 정보를 전하는 과정에서 부인은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내연녀', '모텔', '뇌출혈', 이 모든 단어를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부인의 마음도 터져버린 뇌혈관만큼이나 아득하게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는 의식이 되돌아올 가망이 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냥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실험적인 의료행위를 조금 더 해 볼 것인가. 의료진은 보호자인 부인에게 치료를 더 해 볼 것인지 물었고, 하루를 고민하던 부인은 한 마디 말을 남기며 치료를 거부했다.
"저는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아요."
결국 환자는 얼마있지 않아 사망하고 말았다.
'바르게 살자.' 이 짧은 다섯 글자를 지켜며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건지. 간사한 우리들의 마음은 나쁜 행동에는 금방 익숙해지고, 착하고 바른 행동에는 금방 지루해지는 것만 같다. 한번 나쁜 행동을 하고 나면 그보다 더 나쁜 행동은 훨씬 쉬워보인다. 문제는 선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이 점차 병들어간다는 점이다. 대개 나쁜 행동을 행하는 사람도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인 줄은 잘 알고 있다. 도덕 규범을 벗어날 때 느끼는 해방감, 그리고 밀려드는 자책과 자기모순으로 인한 번뇌. 그러한 마음은 언젠가는 결국 곪아 터져 신경질, 불안, 우울, 히스테리 등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아무리 가벼운 것들이라도 옳지 않는 행동은 가능하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번 시작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조금 더 쉬울 테니까. 그럴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혼탁해지고 병들어갈 테니까.
이러나저러나 착하고 바르게 살아서 손해볼 것 없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나의 추한 선택이 내 인생의 마지막 모습이 되진 않을지.
바른 마음을 품고 살자.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1. The Economist에서 발간한 'The 2015 Quality of Death Index'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죽음의 질 순위는 18위이다. 'End of Life Care Strategy'를 내세우며 국가주도적으로 생애말기 문제를 다루었던 영국은 1위로 우리나라에 비해 약 30% 높은 점수를 기록하였다. 대만은 세계 6위로 동아시아권에서는 1위를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