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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

무슨무슨 책을 읽고

by 루펠 Rup L Feb 03. 2025

며칠 전 알라딘 헌책방에서 책을 한 권 샀다. 원래 구입하려던 책이 두 권 있어서 갔다가 한 권은 찾았는데 다른 한 권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표지의 '활자 중독'이니 하는 말에 혹해서 내용을 한 번 쓱 훑어보고 구입했는데, 역시나 평소와 다르게 결정하면 그 끝은 언제나 후회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스스로 책을 많이 읽었다고 단순히 자부하는 건지 그걸 자랑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인정받지 못하던 시간이 억울했던 건지 아니면 애초에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읽는 건지 셋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한데 틀림없는 건 순수하게 첫 번째일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우선 단어 선택들이 스스로 자의식이 과잉된 것처럼 너무나 과장되어 있었다. 이런 말투를 책에 대해 쓴 글에서 느꼈을 때는 한 층 전체를 차지하는 수집 도서 컬렉션을 보고 놀라 그 사람의 노력에 대해 찬양하듯 설명하는 부분이라거나 유럽 중세시대의 책 생산 과정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보고 마치 상상도 못 한 거대한 성당 건물에 들어갔을 때처럼 압도되었을 때 정도였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면서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용어를 소개하면서 그런 지식들을 우스갯소리로 짜깁기 하는 책을 대단하다는 걸 보니
'아, 이 사람과는 절대 개인적으로 엮이면 안 되겠다.'
는 생각이 드는 무척 피곤한 스타일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에 수능 문학 부문 문제집을 풀어주면서 선생님이 절에 대한 글이 나오자,
"너희 중에 <등신불> 읽어본 사람 있어?"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한 명만 손을 들고 나머지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둘러보던 선생님이 줄거리를 차근차근 설명하였는데, 듣다 보니 집에 있는 한국문학전집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결론에서 이러이러하지 않나요? 제목은 몰랐는데 집에 있어서 읽어봤어요."
라고 손을 들고 이야기했다. 그때 선생님의 반응이,
"손 내려. 제목도 기억 못 하면 안 읽은 거지, 뭐."
였다. 내 주위에도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것만 관심이 있다며 실사구시가 어쩌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 실사구시라는 말조차 부정한다.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을 가리려는 시도, 놓친 것이 있을 때 만회하려는 노력 등 이름 없이 스며든 경험이 실용이라는 간판을 내세운 결과물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목을 하나하나 기억할 시간에 60권이 넘는 문학전집을 읽어나가면서 각 작품들의 제목외울 수 없었을지 몰라도 그 소설 한 편, 수필의 감상 한 줄 한 줄이 모두 나에게 간접 경험이 되어 잠재의식에 차곡차곡 쌓였으리라 믿다.
실시구시라는 말은, 무언가를 실용적인 면에서 판단한다는 뜻인데, 나는 정보를 어떤 것이 있구나, 정도에서 그 존재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가능성이 크게 증폭된다고 생각한다. 실사구시라는 단어는 당장의 업무에서나 쓸 말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것은 버린다,라는 생각도 실용적인 것이 무엇인지 현재의 '나'가 잘 안다는 오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어서 물리 법칙과 금융 공학만 줄기차게 바라보다가 노년에 집구석에서 버리지 않고 요행이 남아 있던 성경과 성경을 읽는 기쁨에 대한 책을 발견하게 되면 고맙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시점에서는 새로 구입하러 나가는 것보다 실용적일 것이다. 어떤 시점에서 그 책이 당장 필요 없으니 버린다는 행동은 어쩌면 미래 실용성에 대한 오판일 수 있다. 내 마음도 변하고 시대도 변한다. 여기서 과연,
"변하지 않는 것은 과거에 붙여준 이름 뿐이다."
라고 외칠 것인가?
나는 아니다.
책은 마음속에
절대로
그런 식으로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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