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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Rup L

내 수입은 원래부터 그저 그랬고 이제까지 모은 것도 그전 같으면 노년까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이제 감염 사태에 대한 국가별 혹은 국민별 반응이 제각각이었던 덕분으로 국가 간 격차가 의외의 방향으로 순식간에 벌어지면서 내가 모은 돈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물가가 떨어진 나라들이 생겼고 프랑스가 그중 하나였다.
대신 그런 나라에서는 아직도 음식이나 걸어 다니는 시체들을 조심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한국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특히 그 집에서는. 언젠가 자고 일어난 내 앞에 부모님과 형의 시신이 손을 잡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파리로 향하는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슬람 국가들은 함께 기도하는 무슬림의 풍습 때문인지 감염도 꽤나 빠르게 휩쓸고 지나갔고 또 그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진정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터키에 정착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터키는 내가 살 만한 수준의 동네에서는 아직 감염 사태 자체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였다.
대륙횡단열차는 혹시 감염자가 있더라도 전염을 최대한 늦출 수 있도록 객실 칸을 복도와 1인실, 2인실로 쪼개어 개별 방을 만들었다. 수상한 일이 발생하면 최대한 서로 격리할 수 있도록 화장실도 칸마다 두 개씩 배치했고 승무원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로봇들을 보냈다. 객실 창문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개폐를 불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붙어 있었다. 유리창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사이로 블라인드가 오르내리게 되어 있어서 블라인드가 내려오면 임의로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맥주를 다 마시고 앞으로 며칠이나 더 여행해야 하는지 일정표를 확인했다. 이스탄불까지 2주. 거기서 파리까지 3일. 아마 3일 내내 달리는 게 아니라 이스탄불에 하루 종일 머물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검역 때문에 탑승과 하차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안 그래도 출입국 업무를 기차 문 앞에서 하기에 시간이 어느 정도는 소요되는데 개통 조건에 감역 사항이 추가되면서 조금만 이상해도 승객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나는 파리에서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기차에 있는 동안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머리 좋은 종족인 인류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 벌어졌던 덕분에 파리에서도 한동안은 사방에서 뭔가 태운 매캐한 냄새를 맡아야 했다. 그러나 그건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므로 싫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좀비사태, 물론 공식적으로는 감염병 사태이지만, 그렇게 지낸 1년, 그 이후로 두 달, 그리고 나서 내가 기차에서 보낸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박테리아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인류가 인류 스스로를 극복한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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