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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Rup L

기차가 동남아로 들어오고 나서는 기차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창문의 블라인드는 수시로 내려오고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오면 돌아다니는 시체들이 생각났다. 러시아 쪽으로 가는 철도는 아직도 열리지 않아 이용하지 못했을 뿐, 재개통만 먼저 되었다면 아마 그쪽을 이용했을 것이다. 출입국 지역에서 사람들이 열차에 타고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국경이 별로 없는 러시아 노선이었다면 훨씬 빨리 도착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인구 밀도 같은 영향으로 시베리아 철도는 곤란한 상황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이 기차에서도 어떤 사람이 박테리아가 아직 죽지 않은 상태로 돌아다닐지 모르니 한 사람이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오존과 자외선으로 화장실 전체 내부 소독을 하는 지경이니 침대칸이나 여러 명이 쓰는 방이 있다면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식당칸도 담배 피우던 사람들의 추억을 위해서나 쓰일 뿐 그 사람들조차 식사는 자기 방에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화라고는 로봇을 통한 직원과의 몇 마디 통화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한국어나 영어나 똑같이 어눌해진 것 같았다. 정신 건강상의 이유인지 내 방에 비치된 인공지능 스피커가 말을 걸긴 했지만 그 제품은 맥주를 주문하려고 해도 승무원 로봇을 불러 달라고 한 후 승무원 로봇에게 다시 주문을 해야 하는 식으로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경이라 따로 대화를 해야 할 이유 자체를 찾지 못했다. 다행히 인공지능 스피커가 눈치가 있어서 싸늘한 목소리로
"That's ok."
라고만 해도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책은 성경과 고전 몇 권만 가지고 왔는데 다른 책을 두 번씩 읽었더니 더 이상 읽기 싫어 성경을 펼쳤다.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차내 서비스로 제공하는 영화를 보면서 틈틈이 읽어볼 생각이었다. 미국의 일부 주들이 독립을 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동안의 혼란 때문인지 무기나 군인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 연방군에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는 좀비들을 재활용하는 뉴스들과 반란을 계획한 주지사들을 체포하는 작전에 대한 뉴스만으로 도배가 된 게 벌써 이틀째였다. 뉴스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뉴스를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고, 외부와의 연결고리는 몇 백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영화들과 몇 천년 전 성경뿐이다. 음식은 재료들이 공급돼서인지 요리사들이 공급돼서인지 평양에서 출발할 때보다 메뉴가 늘어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점차 즐거워졌다. 심지어 추가요금 없이 마실 수 있는 술에도 와인이 추가되었다.
우리 칸에는 내 방에서 몇 걸음 걸어가면 있는 방에 어떤 미국인이 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가끔 방을 들여다볼 일이 있었는데, 누울 만한 선반 같은 침대와 그 앞의 테이블과 상자 같은 의자로 간신히 채워진 납작한 1인실이 아닌 정사각형 모양의 2인실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일행이 있는 줄 알았으나 이제껏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일이 없었고 특이한 것은 테이블 위에 항상 똑같이 놓여 있는 타자기였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을 꼭 닫지 않는 것 같았고, 나는 낮 시간에 환기를 위해 천장에서 바람이 내려오면 먼지를 내보내기 위해 문을 열어놓는 편이었는데, 그때면 그가 타자기를 치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저녁에는 다른 승객들을 생각해서 문을 닫아놓는지, 복도에 나가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만 타자 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곤 했다.
감염병 사태로 공공 서비스들이 타격을 받으면서 전기 공급에도 차질이 생길 경우에 대비해 타자기가 전세게적으로 순간적인 수요 과잉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한글 타자기는 예외였다. 그 뉴스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집에 건전지로 문서를 저장할 수 있는 키보드를 사다 놓았었다.
"어차피 타자기를 가지고 뭘 써도 실제로 쓴 걸 사용할 데가 인터넷밖에 없으니 결국 스캔을 하거나 다시 써야 하잖아. 그럴 거면 그냥 휴대폰이나 랩탑보다 오래 저장할 수 있으면 그만인 거 아니야?"
라고 형이 말한 것처럼, 실제 타자기는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젊은 세대가 좋다면 다 따라 해 보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윗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무실에도 타자기가 한 대 들어왔지만, 자판도 다르고 백 년이 넘도록 따로 개량이 된 것도 아니어서 어쩌다 한두 명이 재미 삼아 만져보았을 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가까운 곳에서 실제로 타자를 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그걸 가지고 왔다면 글 한 편 뚝딱 썼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영문타자기는 컴퓨터 키보드배치나 사용법이 동일하니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훌쩍 떠나면서도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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