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푹 잤는지 모르겠다. 선호는 봉이의 톡에 눈을 떴다.
[쟈깅. 굿모닝. 아침 묵자.]
어휴, 쟈깅이래... 선호는 실소를 머금고 창문을 열었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 정리를 하는데 또 톡 수신음이 들렸다. 미소 담뿍 입에 물고 다시 휴대폰을 집어드는데 은호다. 아무런 메시지 없이 동영상만 보내왔다. 출처는 은호 개인 SNS. 지난밤 올린 모양이다.
호텔의 야외테라스에서 은호가 팬들에게 보낸 메시지다.
[클레어 한입니다.
저 이제 괜찮아요,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놀라게 드릴까 해요.
지난번 공연에서 마침표를 못 찍었잖아요.
장소 섭외되는 대로 다시 공지할게요.
걱정하셨던 분들 꼭 다시 모시겠습니다.
무료공연이니까 가볍게 오시면 됩니다.
건강 이슈도 있고 내가 진짜 내 일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볼게요.
은퇴를 할지 아니면 느리게 갈지 고민해 보는 시작점이 될 거예요.
곧 만나요, 안뇽~ ]
봉이와 봉이 아저씨, 선호가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봉이 너 로또 맞았냐.”
“나? 왜?”
“아침부터 히죽거리잖아. 뭐 좋은 일 있나 싶어서.”
“로또라면 로똔가..”
봉이는 선호를 보고 다시 히죽 웃는다. 봉이 아저씨는 두 사람의 시선을 감지하고는 저 혼자 헛기침한다.
“재근이는?”
“그 자식 얘긴 하지도 마. 싹수가 옐로야.”
봉이 아저씨는 저 혼자 픽 웃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도 알았던 걸까, 봉이도 오재근의 검은 속내를 애써 덮었다. 내 아빠지만 창피했고 다 큰 딸이 그런 취급받은 걸 굳이 알릴 필요도 없으니... 그리고 선호 앞에서도 굳이 상처 안 받은 척, 안 민망한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삭제되면 그뿐일 놈이니까. 양아치가 가고 내 사람이 왔을 뿐.
“아들내미, 별일 없으면 아침은 꼭 내려와 먹어.”
“그럴게요.”
일상의 평화는 다시 이어졌다. 밥 먹고, 깔깔거리고, 음식이 짜다 타박도 하고, 설거지는 니가 해라... 늘상 있어왔던 두 가족의 작은 평화. 돌이켜 보니 이 하찮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선호는 어른이 되었다. 달라진 건 그리운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것뿐..
아.. 할머니...
미움받은 기억밖에 없던 모친이 버리고 떠났다.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웠고 내내 상처가 됐지만 선호가 단단한 어른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할머니와 아빠의 에너지가 선호를 양지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공짜 공연이라니!! 어떻게 내 허락도 없이 감히 은퇴를 입에 올려!.”
은호의 SNS를 확인한 해령은 게거품을 물었다.
“차대표, 이거 무효야. 알지? 해명 인터뷰 준비해. 당장.”
“여기서 엄마 지시 들을 사람 단 한 명도 없어.”
정민이 수습하듯 거들고 나섰다.
“여사님, 어제 은호랑 얘기 끝냈습니다.”
“뭐야?”
“현정이는 당분간 일을 쉰다고 하고 저도 다른 아티스트 접촉 중입니다.”
“나는..!!”
“엄마는 미국집 가져. 가서 재혼을 하든 그 좋아하는 크루즈 여행을 하든 후진 양성을 하든 알아서 하시라고.”
“...!!...”
“명의는 엄마 이름으로 할 거고 현금도 좀 챙겼어. 어때, 퇴직금 스케일 꽤 크지? 명의변경 해줄 변호사 선임했어. 미국에 가서 마무리하면 돼.”
“갑자기 쓰러지고 갑자기 깨어나서는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허튼소리 아니야. 지금 결정 안 하면 다 한선호한테 줄 거니까 생각 잘해. 앞으로도 한선호 건드리면 내가 안 참아.”
은호는 할 말 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해령은 황당해져 은호를 다시 눌러앉혔다.
“뭐야는 거야, 누구 맘대로 그 새파란 나이에 은퇴를 해? 니가 누구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난 내 힘으로 노력했고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정상적인 부모는 그 재능을 나눠줬다고 지분 주장하지 않아. 더 이상 엄마 허영심에 빨대노릇 더 이상 하지 않겠단 소리야.”
“배은망덕한 기집애!!!!!!!”
해령은 풀스윙으로 은호의 뺨을 쳤다. 헝클어진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은호는 헛헛하게 웃었다.
“미국 저택 명의 변경 취소.”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쁜 기집애.”
“어, 누구 딸이니까. 어디 가겠어, 그 징글징글한 DNA. 지분 요구하려면 그런 거나 해야지.”
“어디 맘대로 해봐.”
“지금까지 내 인생 맘대로 휘두른 거 손해배상, 정신적 피해보상 할 수도 있어.”
“차대표, 뭐 하고 있어. 쟤 좀 말려!!”
“오늘 오전에 클레어 한 계약 해지 됐습니다.”
해령은 이 상황이 황당할 뿐이다. 가끔 들이박긴 했지만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딸이 과격하게 변했고 차대표도 이상하게 엇나간다.
“내일 오전까지 체크아웃하면 돼.”
은호와 정민이 나가고 해령은 홀로 남겨졌다.
은호는 조수석에 말없이 앉아있다. 운전하던 정민은 힐끗 은호를 봤다.
“여사님 충격 크실 텐데.”
“그동안 누린 걸로 충분해. 한선호한테 약물 누명까지 씌웠다며. 당신도 몰랐어?”
“여사님이 몰아붙이니 당연히 검사의뢰한 줄 알았지.”
“검사도 안 하고 범인 몰이 했단 거야? 정말 끝간 데 없네.”
“담당 의사는 모르는 얼굴이더라고. 그 윗선일 수도 있어. 확인해야 해.”
“됐어, 엄마란 사람 정말 징글징글 해.”
“신유민도 SNS 본 모양이더라.”
“계약 진행 중이지?”
“어. 그 공연 같이 해보고 싶대.”
“그래주면 고맙지. 클레어와 친구들로 타이틀 만들어줘.”
“친구들?”
무슨 생각인지 은호는 피식 웃는다.
“아, 어글리 씨.”
정민도 환하게 웃는다.
은호는 집에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선호는 은호방 옛날 가구를 죄다 거실에 늘어놓고 방 벽면에 페인트 칠하고 있었다.
“왔냐.”
“놔둬, 사람 불러서 하면 되는구만.”
“콧구멍 만한 방에 뭔 사람을 불러. 니 물건들이라 버리지 않았어.”
“그냥 쓸게.”
“저 유치한 공주침대를 그냥 쓰겠다고?”
“아빠가 달아준 캐노피도 있고 좋은데 뭐.”
“이 집, 창고로 쓸 생각이구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시집도 보내준다며. 침대 길이 연장되는 걸걸? 아빠가 어른이 돼도 쓸 수 있다고 했다고.”
“기억력 좋네.”
“짜장면이나 시켜줘. 배고파..”
“으이그.. 조금만 기다려, 소개해줄 사람 있어.”
“최봉이? 둘이 사귀기로 했어?”
“너 봉이랑 내통하냐?”
“일생 눈치인생이다, 내가.”
“그렇게 됐다.”
“최봉이 짝사랑 드디어 성공했네?”
“언니라고 해. 니 친구냐, 말끝마다 최봉이 최봉이. 나한테 함부로 한다고 봉이한텐 그러지마.”
“뭐야. 벌써 편드냐.”
그때 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길 왔다고? 한선호 옷?”
남매는 갸웃해서 시선 나눈다.
집 앞 벤치에는 현정이 앉아있었다. 은호는 다가가서 좀 떨어져 앉았다.
“깜짝 공연한다며.”
“어.”
“신유빈이랑 니네 오빠도.”
“가볍게 그냥... 팬콘서트.”
“의상, 내가 할게.”
“잠깐 쉰다며.”
“그니까 한다고.”
은호는 쇼핑백을 내민다.
“빨래 몇 개 걷어왔어.”
“신유빈 의상 준비할 때 같이 하려고.”
“나는?”
갑자기 현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네. 간다.”
현정의 뒷모습을 보다가 은호는 갑자기 달려가 현정을 돌려세웠다. 놀라보는 현정인데.
“지랄 맞은 내 옆에 있어주느라 욕봤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좋았던 시간만 기억해 줘.”
현정은 쓸쓸한 얼굴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니 의상도 준비 중이니까 징징대지 마, 지지배야.”
은호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그때 두 여자의 미소를 뚫고 배달맨의 오토바이가 섰다.
“어, 짜장면이다. 한선호가 시킨 거 왔나 봐.”
“가라 가.”
현정은 심드렁히 차에 올랐다. 은호는 현정의 차에 대고 크게 팔을 휘젓고는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야, 누구 맘대로 콘서트를 해!”
“영광인 줄 알아. 이 어글리야.”
남매의 목소리가 멀리 들려오면, 현정은 차창을 닫으며 미묘한 미소로 출발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