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친절을 가로채는가-
관리자가 되기 전에도 나는 친절한 교사였다. 친절했던 교사 시절에 내가 주로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과 '보람된 기쁨'이었다. 나는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그래서 친절했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내 노력에 대한 보람과 기쁨을 얻으며 교사라는 자리를 버텨냈다. '교사는 원래 고된 직업이야. 이게 보람이지-'하는 생각을 하며 관리자가 되는 그날까지 그냥 열심히 달렸다.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내 모습보다 인정받고 싶어서 순응하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원장님과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을 대했다.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 논문을 쓰면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지 않고 규칙을 가르치고 싶었던 나는 '만 4세 유아가 약속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실행연구'라는 주제의 질적 연구를 계획했다. 나의 수업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나와 아이들이 주고받는 교류를 분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착한' 교사라는 자기 인식이 있었던 터라 마이크로티칭에 자신이 있었고, 자신을 분석하고 수업 방법을 개선하는 '실행연구'라는 연구법을 선택했었다. 놀랍게도 영상 속의 나는 그렇게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화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경직되고 서두르고 난감해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찍히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관리자일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도 나는 친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에게 친절은 그저 '순응'이었다. 나는 왜그렇게 인정받고 싶고,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했을까?
내 아이를 키워보고 내린 결론은 부드러운 사랑과 엄한 사랑을 균형에 대해 몰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부드러운 사랑만 사랑으로 인정했고, 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 통제와 억압이라고 치부했다. 아이들에게 규칙을 잘 가르쳤어야 했는데 엄한 사랑을 혐오하여 쓰레기장에 갖다 버렸으니 규칙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규칙을 가르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는데 친절하고 싶었던 나는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10년간 현장에서 유아를 돌보다가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틈에 교류분석 이론을 배우게 되면서 친절과 순응, 억압, 분노 등에 대한 나의 모호했던 인식들은 안개가 걷히듯 깨끗하고 명확해졌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단번에 변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관리자가 되어 보니 배운 것들을 적용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지만, 나의 성대와 사지와 안면 근육은 뇌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뇌가 정보를 내려주는 족족 가운데서 잽싸게 가로채가는 방해꾼이 있는 것 같았고, 그 범인은 바로 얼어붙은 마음이었다.
나의 이성적인 사고는 '친절하게 표현한다면 객관적인 정보를 주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가 아니야.'라고 마음을 설득해 댔지만 마음은 동의하지 않았다. '친절하게 거절한다면 상대방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야.'라고 피력했지만 마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오로지 '좋은 사람'이고 싶어만 했다. 원장의 책상에 앉은 나는 분명히 어른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기능하고 있는 자아는 눈치 보는 어린아이였다. 이제는 당당하게 나의 내면에 있는 그 꼬마에게 말한다.
들어가- 지금은 네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야.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제하고 자율적인 행동과 사고를 억압함으로써 타인의 복종을 이끌어낸다. 힘을 가진 자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누군가는 그들의 통제에 따르고 그들의 억압에 순종한다. 나는 과거의 그러한 조직 문화에 최적화되어있던 교사였다. 그러한 내가 관리자가 되어 순응의 반대편에 앉게 되었고, 역할 전환이 단번에 되지 않아 여전히 순응적인 사람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관리자가 되어서도 나는 나를 칭찬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어린이집 원장이 관리해야 하는 주요 대상은 교직원과 학부모이다. 한 명의 관리자가 여러 명인 관리 대상의 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힘에 부치기는 했지만 반대로 그 많은 사람들을 단일한 나의 스타일에 맞추게 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진이 빠졌기 때문에 내가 맞춰 내는 편이 쉬웠다. 아니, 그게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해보니 진이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친절하면서도 권위(힘)를 가진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걸까?
나의 경우 친절을 순응과 복종으로 오해하고 있었으며, 친절을 상납하면 관리 대상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친절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으며, 잘못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친절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여 내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라는 씨앗의 싹을 틔우고 강인하게 자라나 보란 듯이 꽃을 피워냈다. 나의 친절을 알아주고 더 큰 친절로 보답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표현하지는 못해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물러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커다란 꽃에 수많은 나비와 벌이 절로 모여드는 것처럼, 친절로 인해 권위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애초에 친절에 대해 왜! 이런 오해를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오해는 어떠한 방법으로 걷어낼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 답이다.'라고 말한 교류분석 이론가 Claude Steiner는 사람들이 사랑을 제대로 주고받지 못하며 심리적 결핍을 안고 사는 것은 스트로크 경제(stroke economy)라는 법칙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스트로크 경제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스트로크(stroke)'라는 개념을 먼저 알아보자.
스트로크란 존재 인정의 최소 단위이다. 내가 존재함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최소 단위의 무언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인 것일 수도 있고, 비언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해."라며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따뜻한 말
"대단해."라며 능력을 인정해 주는 따뜻한 말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는 따뜻한 손길
엄지 척! 해주며 성과를 축하해 주는 힘 있는 손짓
말없이 미소 지어주는 깊고 따뜻한 눈길
맞닿은 등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온도
위의 예가 긍정적인 스트로크라 할 수 있다. 이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류로 하여금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와 자신의 능력에 긍정적인 개념을 얻고 더욱 노력하게 된다. 즉 스트로크를 통해 마음의 힘을 기를 수 있으며, 자기 존중감과 자기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 같은 긍정적인 스트로크만 있다면 좋겠지만, B급 같은 부정적인 스트로크도 함께 존재한다.
"저리 가, 귀찮게 좀 하지 마."라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차가운 말
"도대체가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게 없니!"라며 능력을 깎아내리는 차가운 말
짜증이나 분노가 깃든 뜨거운 손길
비난을 위한 삿대질
사랑이 담기지 않은 메마른 눈빛
부정적인 스트로크를 왜 B급이라고 표현했냐면, 이 부정적인 스트로크는 긍정적인 스트로크만큼 제 역할을 하지는 못하지만 무(無) 스트로크보다는 나으므로! 사람들은 A급이 없다면 B급이라도 챙겨서 마음의 힘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관심이 가장 해롭다. 자신에게 기대만큼의 관심과 친절, 존중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심리적 게임에 'Start!' 버튼을 누른다. 상대를 도발하고 부추겨서 부정적인 스트로크라도 얻어내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의 몸이 음식을 통해 영양분을 얻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스트로크를 받고 힘을 얻는다. 기아상태에서는 흙탕물이라도 마셔야 하듯 스트로크의 기아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적인 스트로크라도 취하여 마음의 허기를 면하고자하는 심리는 당연하다.
스트로크는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가 된다. 그러니 관리자로서 내가 관리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긍정적인 스트로크를 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옳은 행동으로 사람들을 이끌고자 한다면 긍정적인 스트로크를 주면 된다. 하지만 많은 관리자들이 관리 대상의 잘못된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부정적인 스트로크를 사용한다. 문제행동을 소거한다고 해서 친사회적 행동이 자발적으로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불행의 요소들을 제거한다고 응당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결국 과거의 관리는 성장보다는 통제를 전략으로 사용해 왔음이 들통났다. 통제와 억압을 통해 힘을 유지하려고 했던 전략을 세부적으로 파해쳐보면 이제는 타파해야 할 다섯 가지 낡은 법칙들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은 Claude Steiner가 이야기한 스트로크 경제(stroke economy)이다.
스트로크를 주어야 할 때 주지 말라.
스트로크가 필요해도 요구하지 말라.
원하는 스트로크를 주더라도 받아들이지 말라.
스트로크를 원하지 않더라도 거절하지 말라.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주지 말라.
우리는 이 경제 법칙에 매몰되어 친절한 관리자가 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이 다섯 가지 스트로크 경제 법칙들을 알아차리고 타파해 볼 것이다. 친절이 권위를 가져온다는 작가의 주장을 아직은 믿기 어려운 독자도 있겠지만, 속는 샘 치고 방어 없이 한 번 들어봐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