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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Aug 28. 2024

지금은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다


가끔, 흔들리는 네 눈동자에서 나를 걱정하는 불안을 본다.

내가 어릴 때 본 엄마 모습인 듯하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엄마 지쳐 보였고 늘 바빴다. 너희를 챙기는 맏이본능은 거기서  태동된 듯하다. 조금이라도 엄마를 돕고 싶었을 거다.


 세상 사는데 죽음보다 어려운 건 없다.

어차피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한 번은 꼭 만나게 된다. 불안해 말아라. 언니 어디 안간다.

걱정을 말아라. 지금은,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다.


언젠가 한번 말한 적 있지만 내 인생 터닝포인트는 엄마 돌아가시기 전과 후로 나뉜다.  라일락  짙던 4월 봄밤을 기억한다.  허연 병원 담벼락 앞에서 소리쳤다.


“엄마! 나도 좀 살자!”

엄마 가시기 전 근 4년을 주말마다 집에 들락거렸다. 한주 끝나는 금요일 밤차로 가서 월요일 새벽차로 돌아와 회사 출근했다. 몸져누운 아버지 수발에 엄마도 지칠 대로 지친게지.  엄마는 그 수발의 끝이 누구 하난 죽어야 끝난다 말했다.


길고도 짧은 상례 3일 치르고 유품이랄 것도 없는 옷가지를 정리하는데 1997년 빛바랜 백화점 포장지. 테이프 점착이 말라 붙은 포장을 뜯으니 분홍빛 내복 한 벌 나오더라. 그것뿐이었겠나. 기념일마다 해다 드린 가락지, 금붙이들 다 나오더라.

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 길로 내 집에 돌아와 옷장, 신발장 물건들 홀라당 끄집어냈다. 1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옷, 장식 한쪽이 떨어졌지만 아까워서 모셔둔 신발. 싹 버렸다.

마지막으로 책장만 5년째 정리 중이다. 곧 끝나겠지?


엄마의 죽음은 우리에겐 불행이었다.

죽는다는 건, 다시는 이제 다시는 못 보는 거니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남은 이들이 있고 그에 마땅히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너지면 나를 바라보는 이들 모두 무너진다 생각했다.

스스로 버텼다기보다 너를 비롯해 남은 이들 덕분에 살아낸 거다.


그렇게 나는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았다.

무엇보다, 우린 못해본 게 너무 많다.  거창한 버킷리스트 정도도 아니다. 너와 보내는 크고 작은 시간마저 너무 절박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은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다.

그러니 너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 살아내어 주라.  

좋은 날을 함께 하자. 후회 없이.

.

.

.

그래서.

가자!  2027년 산티아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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