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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BJ Jun 08. 2022

아버지의 장례식, 그리고 또 한 번의 장례식

아버지를 보내고 21일 만에 마주한 엄마의 장례식

장미의 계절답게 6월의 아침 햇살을 받은 빨간 장미가 눈부시게 예쁘다.

비로소 아름답고 예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도 장미꽃을 참 좋아했는데..."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4월과 5월을 통째로 도둑맞은 느낌이다.

이삿짐을 풀어놓은 듯 어수선하기만 하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언제라도 다가 올 일이라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충격은 컸던 모양이다.


2022년 6월 7일.

오늘이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49일째다.

불교식 장례 예법을 보면, 사람이 죽은  49 동안에 죽은 자는 생전의 공덕을 심판받아 내세에  곳이 결정된다고.

더 좋은 내세로 갈 수 있도록 49일째 되는 날 불공을 드리는 의식을 49재라고 하며, 49재가 끝나면 내세로 떠났다고 보고 탈상을 한다고 되어 있다.

유교의 장례 전통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불교식. 유교식 따질 것 없이 요즘은 3일 만에 탈상을 하는 경우가 많아 49재 의식을 행하는 가정은 드문 것 같다.

우리도 3일 만에 이미 탈상을 마친 상태라 49재의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에

아버지의 49일 때처럼 시간이 허락하는 사람들은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자고 가족 단톡방에 알림이 왔다.

종교를 떠나 아버지 엄마가  좋은 세상으로 가셨으면 하는 마음에 멀리 서라도 빌어본다.




4월 19일.

21일 만에  다시 오게 된 김해공항 주변에는 벚꽃이 진 자리에 초록잎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미 익숙해진 동선으로 도착지에서 금방 내려와 거리로 나왔다.

초록 이파리 빈틈으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인다.

모두가 살아 숨 쉬는 이 공간에, 같은 하늘 아래 아버지도, 엄마도 이제는 없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어온다.


‘친정이 어디냐?’ 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이 와중에 뜬금없게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학사전에 ‘친정’은 ‘결혼한 여자의 본집 또는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나와있으니… 뭐라 답해야 할지 좀 애매하긴 하다.


정확히 21일 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에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했다.

전신에 힘이 빠지고 뭐부터 챙겨야 할지 허둥대다 겨우 정신을 차려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옷 몇 가지 챙겨 짐을 쌌다.

둘째 언니한테서 아버지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엄마가 아나라 아버지라고?” 재차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병원에 계신 건 아버지가 아닌 엄마였기 때문이다.

2년 전 119에 실려간 엄마는 그 시점부터 우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코로나로 면회조차 안 되는 상황이라 자식들 마음속에서도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는 점점 각자의 일상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고,

여러 차례 위급한 순간들을 치르며 혹시 모를 기적 같은 걸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3월 29일.

우리 나이로 올해 95세인 아버지…

총기가 좋아 100세까지는 끄떡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은 그래서 더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요즘 세대의 아빠와 딸처럼 아버지와의 유대감이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었기에 충격이 덜 할 줄 알았다.


몇 달 전 허리를 다쳐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는 상황에 놓여 칠순을 넘긴 큰오빠가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다.

병원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큰아들 집만 고집하는 바람에 발목 수술을 앞둔 오빠의 상황이 난감했던 터.

누구도 꺽지 못할 아버지의 막무가내식 고집을 알기에 동생들은 할 말을 잃었고,

그런 아버지를 입 모아 험담하는 것으로 맏이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4시경,

'병원으로  가시지 저렇게 큰아들만 힘들게 한다' 흉을 봤던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말없이 홀로 그렇게  길을 떠나셨다.

나이 드신 분들의 로망이라는 '자는 잠에 맞이하는 죽음의 복?'을 받으신 셈이다.

마지막 순간에 분명 소리쳐 큰아들을 불렀을 텐데…그 찰나가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코로나 때문에 애들이 못 오는가베~”

옛날 분이라 표현에 서투르고 무뚝뚝하신 아버지는 당신의 마지막을 예견하셨던지 가시기 얼마 전에 자식들이 보고 싶었나 보다.


늘 그렀듯이 회한이 밀려온다.

 ‘  자주 찾아뵐걸.’ ‘지난번에 갔을  아버지 곁에   있다 올걸.’…’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번이라도 ....'


당신이 손수 자리 잡아 마련해  묘 자리에 아버지를 홀로 두고 억지로 산을 내려왔다.

장례 지도사가 그랬다. 뒤돌아보지 말고 곧장 내려가야 한다고. 자식들이 붙잡으면 영혼이 좋은 곳으로 못 간다고.

그랬는데 발걸음은 무거워 제자리걸음인데 고개는 자꾸 뒤로 돌아간다.

멀리서도 티가 날 만큼 흙이 마르지 않은 둥그런 무덤은 듬성듬성 덮어 놓은 잔디가 어색해 더 쓸쓸해 보인다.

이별은, 부모와의 영영 이별은 아무리 준비를 한다고 한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삼우재를 지내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세상은 움직이고 내 일상도 전과 다름없이 굴러간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아버지는 멀리 큰오빠 집에 계실 것 같고, 간간히 칠 남매 단톡방에 아버지의 근황을 알리는 소식이 ‘카톡’ 하고 울릴 것만 같다.

…그러나 더 이상 ‘카톡’ 알림에 아버지 소식은 오지 않는다.


특별히 달라진  없는  일상에 그 전과는 결이 다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 끼어든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계신 아버지의 영상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난다.

이토록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가 싶어 나 스스로도 의아하다.

부축하느라 잡았던 아버지 손이  보드랍고 따뜻했었다그게 마지막이란 걸 알았더라면 더 오래 잡아드릴 걸.


며칠간 매사에 의욕도 없고 멍-하더니 겨우 적응이 돼 가는 것 같았다.

아침 운동으로 산에도 가고, 주말에 라이딩도 하고, 그렇게 일상을 되찾아가려 노력했다.






 “사랑해요 엄마!”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은 영상 속의 할머니에게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 아버지께 미처 못했던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엄마가 아버지 만나면 '사랑한다'라고 대신  전해주세요~". 재롱? 떨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주렁주렁 매단 콧줄이, 마스크가 무척 버거워 인다. 이제 엄마는  이상 간호사를 보면서도 웃지 않는다.

초점을 잃은 엄마의 눈은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여 허깨비 형상 같다.


큰언니가 아버지 소식을 전했단다.

“엄마! 힘드시죠?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 편하게 아버지 곁으로 가세요.”

반응은 없었지만 분명 알아 들었을 것이다.

74년이란  세월을 부부의 연으로 함께 으니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바람이라도 전해주지 않았을까.

아버지 무덤 앞에서도 같은 부탁을 드렸었다.

'고통 속에 엄마 홀로 두지 말고 좋은 곳으로 함께 모셔 가시라고.'


그랬었는데….  거짓말처럼 21일 후.

자식들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엄마도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길을 떠났다.

아버지가 엄마를 모시고 가신 게 틀림없는 것 같다고 우리는 믿고 싶었다.

드라마틱하게도 마지막 시간이 비슷한 걸 보면 두 분은 하늘이 내린 천생연분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엄마의 부고 소식은 담담하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하게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짐을 싸고, 한 동안 비울 집을 대충 정리하고 길을 나섰다.




유별나게 꽃을 좋아했던 엄마는 하얀 국화꽃 속에서 옅은 웃음을 짓고 계셨다.

아버지가 주문한 초상화 대신 팔순에 찍었다던, 엄마 집에  걸려 있던 익숙한 사진이 검은 띠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맞아. 엄마는 초상화가 너무 옛날 할머니 같다고 맘에 안 드신다 하셨지.’


4월 19일.

4.19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혁명'이었다면, 이제 우리에겐 엄마의 날이 됐다.

다른 집의 경우를 보더라도 우리 남매들은 복이 많았던 듯싶다. 막내인 내 나이 오십 끝자락에 비로소 고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문상객들의 연령대가 평균 70세 이상은 되어 보인다.


아버지 때도 그랬지만 요즘 장례식장은 예전보다 상주를 배려하는 면이 커 보인다.

상주 자리에 좌식이 아닌 의자가 놓여 있다. 상주가 편해도 되나 싶지만 어쨌거나 장시간 앉아 있기가 덜 불편하다.

 남매라 상주 자리가  찼다. 고인이  외로울  다며 보는 이들도 다행스럽게 기는 듯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가정에 자식이 한 둘 뿐이라 미래의 장례식장 풍경이 그려져 그 와중에 우리끼리 괜한 걱정을 주고받았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3주 만이라 엄마 부고 소식을 알리기에 뭣하다고 다들 아주 가까운 이들에게만 연락을 취했단다.

그렇잖아도 코로나가 장례식 문화를 가족장으로 바꿔 놓았다더니, 오히려 간소해서 더 나은 것 같다.


어찌어찌 알고 왔는지 지난번 아버지 때 찾아와 준 문상객들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참으로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상주들은 저마다 각자의 손님 접대로 삼삼오오 식당에 모여 앉아 있고,  속에 아주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어릴  고향 오빠 언니들.

내 친구의 언니 오빠가 곧 내 언니 오빠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아무개' 하면 모두가 알 정도로 좁고 뻔한 시골 동네의 인간관계망이라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어색함 없이 어제 본 듯 정겨웠다.


밤새워가며 상주와 함께 있어주던 예전과는 달리 밤 아홉 시 밖에 안 된 시간이건만 벌써 조문객뜸하고, 식당 도우미분들도 일찌감치 마감 준비를 한다.

 남매가  자리에  모였다. 각자 가정을 이룬 뒤로는 우리  남매 모두가 이렇게  곳에 모여  밤을 함께 했던 적은 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일이 우선이다 보니 모두가 함께 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부모님과의 이별 자리가 자식들의 모임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각자의 분향소 입구에 고인의 나이, 가족 구성원을 알 수 있는 문패가 붙어 있다.

어떤 죽음이든 안타깝고 슬프지 않을 이별이 있으랴만, 그래도 우리 경우처럼 고인의 연세가 많으면

상주도, 문상객들도 조금은 가벼워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생전에 건강하고 행복해했던 기억만 간직하자며 불과 2  우리 집에 오셨을  함께 했던 사진과 영상들을 보면서 아버지 엄마를 추억했다.

요즘 시대에는 말도  되는 출가외인 타령하며 딸들에게 섭섭하게 하셨던 아버지 흉도 간간히 보면서 

웃기도 하고 울컥 솟구쳐 오는 그리움에 울기도 했다.

'우리 엄마 저 때만 해도 참 고왔었네~'

끊이지 않고 피워 올리는 향의 자욱함 뒤에서 영정 속의 엄마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엄마의 현주소를 실감 나게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는  코끝에 스며드는 향냄새가 진하게 전해온다.

팔순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엄마는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는 그 말이 좋았다며 몇 번이나 자랑했었다.

"저 사진이 엄마 팔순 넘어서 찍었던가?" 정말로 사진 속의 엄마는 80세 보다 한참 젊어 보인다.




자정을 앞둔 한 밤중에 옆 201호실에서 울음 섞인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애써 귀를 세우지  않아도 상주들의 곡소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아버지 영정 앞에서 자식들끼리 다투는 모양이다.

'돈, 돈, 돈…’ 돈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 결국 돈 때문인 듯했다. 나름대로 사정이야 있겠지만 오가는 말들이 씁쓸하게 들린다.


 오전에 초우를 지낸 끝에 장례지도사의 주문대로 형제자매끼리 맞절을 했다. 부모님 마지막 가시는  편히 모시라는 의미란다.

부모님 영정 앞에서 자식들끼리 다투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기까지 했는데, 그 가끔을 그날 바로 목격한 셈이다

항상 돈이 문제다. 돈 아니면 이런 자리에서 자식들끼리 싸울 일이 뭐 있을까.




엄마 장례식 둘째 날.

장례식장 도우미가 차려주는 세 끼를 꼬박 챙겨 먹었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하는 일 없이 때가 되면 배고픔이 찾아왔다.

금방 삶아 부들부들한  돼지고기 수육이, 뜨끈한 시래기 된장국이, 평소에는 손도 안 가던 꿀떡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건지…


의례에 따라 재를 올리고 형식에 맞춰 어색한 ‘아이고~’를 합창했다.

그냥 서러워 꺼이꺼이 울다가도 굳이 '아이고~'를 하라니 눈물도 잠시 멈춤을 한다.

조금 쑥스럽기도  입만 벙긋하다 곁눈질로 힐끗 보니 언니 오빠들어색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상주가 이렇게나 많은데 곡소리가 작으면  되지 싶어 큰소리로 아이고~ 쳤다.

슬픔과는 별개로 아주 잠깐의 용기? 가 필요했다. '시대가 변했어도 아이고~는 그대로가 맞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영어 같은 ‘아이고~'는 대한민국만의 마법 감탄사다.

기쁠 때, 슬플 때. 놀람, 실수, 안타까움, 아쉬움… 등 정말 마법처럼 여러 뉘앙스에 두루 쓰인다.


당일 있을 입관 의례를 앞두고 몹시 긴장했다.

수의로 한 겹 두 겹 아버지를 감싸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얼마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니 생각만 해도 먹먹해온다.

엄마를… 어찌 볼까…2년 만에 가까이서 보게 될 우리 엄마. 새처럼 작아져 있을 엄마를...


눈을 감고 싸늘하게 누워 있는 엄마를 보는 순간 꺼이꺼이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식의 만남은 아니었어야 했다.

이제야 겨우 만져볼 수 있는 엄마 얼굴이 이토록 차가워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소리쳐 봐도 대답이 없다.

우려했던 것처럼 엄마는 너무 작고 왜소하고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마스크와 콧줄 없는 엄마 얼굴을 본 것이 2년 만인데...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오히려 평온해 보여 보내 드리기가 한결 나을  았다.




20년도 훨씬 전 회갑을 넘긴 부모님을 생각해 수의를 마련해두었다.

그 당시 원단 사업을 했던 남편은 거래처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았다며, 장인이 손수 짠 안동포로 만든 수의를 꽤나 비싼 돈을 주고 마련했었다.

부모님이 건강할 때 미리 준비해 두면 장수한다는, 더군다나 막내가 해 드리면 더 좋다는 풍습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수의를 선물로 드려? 나도 기분이 이상한데 이걸 받은 엄마 아버지 마음이 어떨 것 같아?"

그래서 한동안 우리가 보관해두자고 했다..

생전에 수의를 준비해 두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염려돼 언젠가 엄마한테 넌지시 물었는데 다행히 그 풍습을 긍정적으로 믿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엄마한테 수의를 전달했을 , 엄마의 표정이 아리송하고 종잡을  없어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했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하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옛 선조들은 그런 식으로 달랬던 모양이다.



<수의에 관해 풀어놓은 글을 찾아봤다.>

- 수의는 염습 때 죽은 사람의 시신에 입히는 의복이다.

- 수의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다.

- 수의가 제작되는 과정과 소용되는 절차가 아주 까다롭다.

   주로 윤달에 만들어야 하고, 아침에 시작하여 하루해 안에 완성해야 하며, 수의를 꿰매는 실은 도중에 잇거나 끝을 옥매 치면 안 된다.

- 수의를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은 죽음을 삶의 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긍정적인 내세관 때문이기도 하다.

- 수의를 지어 놓았다는 말이 어른들 귀에 들어가면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 수의를 입을 당사자도 수의를 준비해 면 마음이 편안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 수의를 준비하는 시기는 회갑이 난 뒤 주로 윤년의 윤월, 윤년의 생일달이나 청명 월에 날을 정하는데, 그만큼 시기가 중요하다고 한다.

-수의를 보관할 때에는 오동나무 함이나, 약쑥, 잎담배, , 좀약 등을 사용해 좀이 슬지 않도록 하고 1년에  번씩 햇볕에 말려 보관해야 한다.



"귀한  준비하셨네요. 요즘 이런 수의는 돈을 많이 줘도  구해요." 장례지도사의   덕분에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장례식장에서 보니 수의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운운하며 상주들의 심리를 적당히 이용해 비싼 수의를 권하는 일부 업체들의 상술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들었는데 준비 해두길 다행이었다.


엄마가 병원으로 가신 뒤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수의 상자는 큰오빠 집으로 옮겨졌다. 보관상태가 아주 좋았단다.

세월이 흐를수록, 백발이 되어갈수록, 상자 속의 수의를 꺼내 손질할 때마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이, 당신의 남편이 입게 될 모습을 상상은 해봤을까?


수의를 입히는 절차가 꽤나 복잡하고 길었는데, 엄마를 좀 더 오래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잠시 헷갈리기도 했다.

    삼베옷이 몸을 감싸고, 엄숙한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자니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와 흐르는 콧물을 억지로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으로 꽃 분홍신을 신고 곱게 차려입은 엄마는 어디 먼 데로 소풍 떠날 채비를 마쳤나 보다.

"마지막 인사드리세요."

이 말에 애써 소리 죽여 참고 있던 울음소리가 저마다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채 가시지 않은 아버지와의 이별과 겹쳐 서러움이 더 복받쳐 올랐다.

머지않아 훨훨 날아오를 나비가 될, 번데기 모양을 하고 누워 있는 엄마를 이제는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크게 울면 번데기에서 나비로 태어나지 못할까 봐 꺼이꺼이 억지로 참자니 울대가 아팠다.


출상하는 날 아침 하늘도 함께 울어 주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시리한테 물어보니 비 올 확률이 30%란다.

아버지 산소에 합장할 예정이라 그전에 비가 오면 안 될 텐데... 걱정을 많이 했다.

아버지 출상하는 날 아침에도 비가 예상된다고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비를 만났다.


버스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완연한 봄이다. 위쪽 지방 하고는 다르게  크고 작은 나무들이 촘촘히 초록숲을 이루었다.

장지에 도착하기 전인데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30 여분 남았으니  사이 비가 그치겠지.

이번에도 기다려 주시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며 잠시 눈을 감았는데 벌써 도착했단다.

그 순간 하늘은 거짓말처럼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파란 하늘이 군데군데 드러났다.

다행이다.'감사합니다!'


"흙이 아직 굳지 않아서 일하기가 쉽네요."

산소에 매장하는 작업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안타까움인지 위로인지 모를 애매한 투로 말을 건넸다.

아버지 산소의 봉분을 허물고 생전의 유언대로 엄마를 함께 모셨다. 지난번 아버지 혼자 모신 산소보다 덩치가 약간 커졌다.

봉분을 낮추고 잔디를 깔고 비석을 세우고 나무도 심었다. 비가 거세게 와도 끄떡없도록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마지막 절을 올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때 이른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다. 엄마가 벌써 나비가 되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면 아버지가 나비로 우화해 마중이라도 나온 걸까? 동화 같은 상상을  보며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버지. 엄마! 고향 냄새 맡으니 좋으시죠?"

산소에서 바라본 어릴  고향 풍경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져 었지만 눈앞이  틔여  산이 가깝게 이고 전망이 좋았다.

두 분을 한 곳에 모셔 두고 내려오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아버지. 엄마!     잡고 부디 좋은 곳으로 소풍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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