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활동을 접고 집에만 은둔(?)한 지 어언 20년쯤 되던가.
요즘의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주변에 젊은 사람이 없다면 들어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것들 투성이다.
사용하는 단어도 그렇고, 사전에도 없는 신종 용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따라가기도 벅차고, 알려줘도 금방 잊어버린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내가 경험했던 것 안에서만 인지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니 폭이 점점 좁아진다.
그러다 보면 아집이 생기고 흔히 말하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아들. 딸은 제 부모를 아집 쟁이로 만들지 않으려도 나름 애를 쓴다.
젊은 세대들의 문화 트렌드를 알려주기도 하고,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공연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세대 간 적응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시대가 우리에게 맞춰주지 않으니 우리가 쫓아가야지.’라며
남편과 나는 일부러 키오스크 주문을 넣어 보는 연습도 가끔 해본다.
아무리 그래 본들 미션 치르듯 어쩌다 부딪혀 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에는 주춤거려지기 마련이다.
중장년층들이 카페에서 주로 아메리카노만 주문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가끔 색다른 종류의 커피가 먹고 싶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나 또한 카페 가면 아메리카노만 주문한다.
실제로 단것이나 우유가 섞인 라테 종류를 별로 안 좋아해서도 그렇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굳이 나를 내놓고 싶지 않음이 더 큰 이유 일게다.
다 알만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아메리카노 말고 다른 종류의 커피 주문하기가 좀 까다롭다.
적어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컵 사이즈도 커피전문점마다 부르는 이름에 약간씩 차이가 있고, 샷 추가니 토핑 선택이니…
이런 생소함들이 낯설어 그냥 편한 대로 ‘아메리카노 주세요~.’하고 만다.
사실 처음 접해 보면 모를 수도 있는 일인데
‘나 이거 몰라요!’ 대놓고 말할 배짱도 없어 물어보는 것에도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니 말이다.
[에피소드 1]
딸아이는 가끔 내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다.
아니 일부러 익숙해지라고 부탁하는 편이다.
“생일 쿠폰 선물 받은 걸로 엄마 아빠 커피 한잔해~”
깜빡 잊고 있었다며 오늘이 만료일이라 꼭 사용하라고 쿠폰을 보내왔다.
거리가 멀어 ‘사이렌 오더’(스마트폰으로 미리 주문하는 것 이란다)가 안된단다.
'뭔 소린지…' 어쨌거나.
“카운터에 직접 가서 주문해야 돼~ 주문하기 5분 전에 톡으로 보낼게.”
카페 앞에서 딸에게 전화했더니 주문할 때의 선택사항을 톡으로 보내왔다.
돌체라떼 따뜻한 거 벤티 사이즈 일회용 컵
돌체시럽 1번 빼고 총 4번만 넣어주세요
일반 우유로 바꿔주세요
차액 스타벅스 카드로 해주세요
나름 몇 번 해 본 경험이 있어 대충 쓱 훑어보니 알 것 같았다.
“어떤 주문 도와드릴까요?”
“돌체라떼 따뜻한 걸로, 벤티 사이즈로 주시구요~.
1번 빼고 4번으로 주세요~.”
속으로 외운 것을 앵무새처럼 늘어놨다.
“네??? 시럽은 다섯 번인데 어떻게 할까요?” 점원이 다시 묻는다.
헐~~!! 나이가 들면 눈치 하나는 빨라진다.
그제서야 얼른 알아채고,
“아, 네 번만 넣어주세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1번 빼고 총 4번만>을 <1번 빼고 4번으로>인 줄 잘못 읽었다.
인지왜곡이다. 처음부터 잘못 읽었고, 그래서 내 맘대로 해석했다.
(시럽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는데 1번은 빼고 4번으로 하라는 줄ㅋㅋ )
"점원이 눈치챘을까?"
“엄마, 아무도 몰라~관심 없을걸!”
이럴 때 그 상황을 한참 곱씹는 성격이 영락없이 내 MBTI 유형에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요즘 애들은 성격차마저 MBTI 같은 신기한 방식으로 알아내더라.
여하튼,
어쩌다 맛보는 달달한 커피가 더 달게 느껴진다.
‘역시 난 아메리카노가 좋아~!’
이다음에라도 적어도 나 스스로는 달달한 커피 주문은 안 할 듯싶어 애써 주문 방법을 외우진 않으련다.
[에피소드 2]
요즘은 생일선물로 쿠폰을 주고받는 문화가 다반사다.
주는 사람 입장에서도 선물을 고르는 것에 고민하고, 포장하고, 배송하는 번거로움 없이
클릭 한 번으로 해결할 수 있어 훨씬 편하다.
받는 사람 또한 선물로 받은 쿠폰이 내 취향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옵션을 변경할 수 있으니 부담이 없다
선물은 그래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느니…이런 건 이미 옛말이다.
주고받는 일이 품앗이처럼 되어 당사자에게도 기프티콘이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덕분에 아들, 딸이 생일 한 번씩 치르고 나면 덕분에 배달음식을 자주 먹게 된다.
맛있게 먹긴 하지만 품앗이 같은 개념이란 걸 알고 나니
결국 아들, 딸이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건 아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부모 마음은 다 비슷하겠지.
“엄마, 집에서 쓰는 머그잔 오래됐지? 하나 사줄게~” 한다.
아직 쓸만하다고 말할 틈도 없이 기프티콘을 받았단다.
"그러면 또 할 수 없이 바꿔야겠네. 테두리 사이에 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긴 했어. 미션 수행하러 가야 하는 곳이 이번엔 또 어디야?"
“투썸플레이스~ 이 쿠폰 보여주면 머그잔 줄 거야~.”
미션이랄 것도 없이 굉장히 간단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산책 겸 집에서 가까운 투썸플레이스에 갔다.
안을 들여다보니 입구 쪽에 사람들이 제법 여럿 있었다.
시국이 시국 인지라 남편은 바깥에서 가다리기로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요즘은 마트나 공공장소에 가면 당연히 열체크하고 QR체크부터 하는 게 순서다.
그날도…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에 빠졌던지 아무런 의심 없이 기계 앞에 섰다.
더군다나 날이 추워 창이 있는 털모자에다 마스크를 꼈더니 안경에 김이 서려 잘 보이지 않았다.
기계 앞에 서서 작은 네모칸에 얼굴을 맞췄다. 아무 반응이 없다.
‘여긴 칸이 왜 이렇게 작은 거야. 얼굴 작은 사람만 오라는 거야 뭐야…’
속으로 투덜대며 다시 작은 네모칸에 억지로 얼굴을 끼워 넣어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보통은 ‘36도 정상체온입니다.’ 이런 음성이 나와야 하는데…
그때 얼른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자와 안경과, 마스크 때문에 기계가 인식을 못하는구나.’
그리고는 기계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모자 창을 들어 올리고 이마를 갖다 댔다.
여전히 무반응. 그제서야 안경을 닦고 자세히 살펴봤다.
이런..! 열체크 기가 아니라 QR체크기였다.
너무 당황스러워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재빨리 QR체크를 하고 뒤를 슬쩍 돌아봤다.
다행히도 바로 뒷사람은 없었지만 주문을 해놓고 기다리는 젊은 친구들이 여러 명 있었다.
나 혼자 기계와 실랑이를 벌이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누군가는 봤을 것 같았다.
순간 너무 부끄럽고 괜히 뒤통수가 간지러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 쿠폰을 보이고는 빨리 나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필 재고가 없어 예약을 걸어둬야 한다고 했고, 하필 신입직원이라 업무가 처음이었던지 매니저한테
물어보고 어쩌고 하느라 오래 걸렸다.
밖으로 얼른 나와 남편을 아는 체했다.
혹시라도 내가 한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를 보더라도 혼자보다는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의아해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어쩐지 기계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더라며,
혼자 부끄럽고 말지 본인까지 부끄럽게 바로 아는 체했냐고 놀려댔다.
나는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내 나이를 잊고 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달래가며.
하지만 처음 하는 것들 앞에서는 별수 없다.
익숙해 보이고 싶고, 자연스럽고 싶은데 처음 보는 기계 앞에 설 때마다 에피소드가 생긴다.
남편과 딸 언니들에게 말하며 큭큭대고 한참을 웃다가도 문득 요즘말로 현타가 온다.
언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럼에도 주눅 들지는 말자.
무려 1970년대 초쯤 동네에서 처음 테레비를 구매한 얼리어답터 집안의 막내딸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라는
아들의 놀림 같은 말을 지지삼아, 새로운 것들을 계속 마주해볼 예정이다.
그러다 보면 얼리어답터 까지는 아니더라도 QR코드 대신 네모칸 안에 얼굴을 가져다 대는 일은 안 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