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2_Casa Gilardi
위치 : 멕시코시티 (Calle Gral. Antonio León 82, San Miguel Chapultepec I Secc, Miguel Hidalgo, 11850, CDMX)
설계 : Luis Barragan
준공 : 1977 (설계기간 : 1975-1976)
연면적 : 430 sqm
용도 : 단독주택
언젠가 한 번쯤은 멕시코에 여행을 오고 싶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라간 건물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이미지로 마주한 바라간의 건물은 인상적임을 넘어서서 감동적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강렬한 색감은 언제나 건물을 촌스럽게 만들어버리는데, 오히려 바라간의 색감은 건물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점이 너무 궁금한 부분이었다.
길라르디 주택은 후아나카틀란(Juanacatlán) 역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어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 주변지역은 단독주택지역이고 도로를 중심으로 2-3층 주택이 일렬로 줄지어있었다. 특징적인 점은 앞마당이 없고 외벽이 도로와 맞닿아있다는 점이었다. 지구단위계획의 건축지정선처럼 규제로 인하여 형성된 경관인지, 아니면 치안이 좋지 않은 멕시코에서 앞마당이 가치가 없기에 문화적으로 결정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한 건축선으로 인하여 도로와 건물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색감과 재료가 다른 건물 일렬로 나열되어 있지만 나름 정돈된 도시 경관을 보여주었다.
길라르디 주택이 있는 도로로 접어드니 핑크색으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건물 하나가 보였다. 내부 공간은 많이 보았지만 외부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단번에 바라간이 설계한 주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라간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보자면 그는 멕시코 과달라하라 출신이고 그곳은 다양한 색채를 가진 건물이 많이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멕시코시티는 수도답게(?) 무채색의 건물이 많으며, 색채가 강한 주택은 뜨문뜨문 보일 뿐이다. 그래서 길라르디 주택이 두드러져 보였던 것 같다. 이후 입장시간이 될 때까지 주택 앞 도로를 걸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외관을 살펴보았다.
외부를 구경하다가 입장시간이 되었고, 사진으로 보았던 멋진 장면들을 직접 마주한다는 설렘과 동시에 실망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안고 내부로 들어갔다. 어두운 입구를 지나 뒤쪽으로 밝은 하얀 공간(계단실+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모두 모여서 주인이 15분 정도 바라간에 대한 간략한 약력, 집이 지어지게 된 과정,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답사를 시작하였다.
우선 다 같이 도로에 면해있는 건물을 둘러보았다. 이 부분은 주택부분으로 1층에는 서비스실, 부엌이 계획되었고, 2층에는 거실과 도서관, 3층에는 침실이 위치하고 있었고, 우리가 돌아볼 수 있는 부분은 2층이 전부였다. 주택부분의 인상적인 점은 벽과 천장은 모두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철저하게 배경이 되었고, 다양한 바닥 재료와 목재 및 가죽 재질의 가구가 공간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가서 거실에 도착했다. 거실의 남쪽으로는 베란다가 위치해 있는데, 3m 정도 높이의 벽을 통해 외부와 시각적으로는 단절되고 빛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베란다 벽에 보라색을 칠함으로써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베란다 벽은 동시에 외부 입면에서 다양한 깊이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북쪽으로는 파티오를 바라볼 수 있는, 멀리 온이 없는 긴 창이 계획되었다. 이 창을 통해 반사광이 일정하게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북쪽으로 왜 큰 창을 냈나 살펴보다가 거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을 발견했다. 바로 집 전체에 천장 조명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방은 자연채광과 스탠딩 조명을 통해 빛을 비추었다. 나는 천장조명을 싫어해서 어느 공간을 가던지 천장을 잘 살피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가 상상하던 방의 모습이 구현되어 있어서 정말 놀랐다.
다음으로 거실 옆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도 역시 천장조명이 없었고, 창은 있지만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서 시각적으로 열려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창을 통해 들어온 노란빛이 하얀 방에 색칠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영적인 느낌의 서재 풍경이었다.
다음으로 2층 옥상광장을 통해 반대편 건물로 이동하였다. 건물이 지어지기 전부터 위치했다는 하카란다 나무와 그 색감을 모티프로 한 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벽 위에 자리 앉은 나무 그림자와 주변 식물을 감상하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반대편에서 주택건물을 살펴보니 다양한 색의 벽, 하카란다 나무, 선인장과 항아리의 배치가 눈에 들어왔다. 무척 생소한 조합이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건축에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촌스러워지기 십상인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성을 자극하는 눈앞의 풍경에 감탄하며 몇 분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쉽게 3층은 주인이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 갈 수 없었고, 다시 계단실을 내려와서 이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진입을 앞두었다. 계단실은 계단판이 목재인 것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난간도 없어서 단순함이 극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배치된 예술작품은 새하얀 계단실이 지루하지 않게 생동감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드디어 연결된 통로에 도착했다. 이곳이 길라르디 주택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다양한 궁금증이 있었지만 우선 이 공간을 감상하였다. 통로에서 멍하니 공간을 바라보는데 마치 집이 아니라 성스러운 장소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와 이어진 식당과 수영장 공간. 통로부터 수영장까지 어떠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적인 감정을 느꼈다.
감상에 빠졌던 시간에서 돌아와 통로 공간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선 프레임 없는 창과 페인트(?) 칠을 통해 창 계획을 하였고, 이를 통해 노란빛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소위 밖을 볼 수 있는 개념의 창과는 전혀 다른, 빛을 머금은 색을 만들어내기 위한 창이었다. 길라르디 주택의 파티오는 식당과 옥상광장에서 바라볼 수 있기에 통로까지 파티오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고, 수영장으로 가는 길의 새로운 경험을 위하여 시야를 포기하고 빛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통로 뒤로 보이는 빨간 벽과 파란 벽은 통로의 신비감을 두 배로 증폭시켰다. 특히 빨간 벽은 지붕을 지지하기 위하여 구조적으로 필요한 요소였을 텐데, 여기에 색을 칠함으로써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디자인 요소로 전환되었다.
이 색채에 대해서 감히 추측해 보자면, 수공간(수영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파란색을 사용하였고 (실제로 파란 벽을 통해 반사된 빛이 수영장 물을 파랗게 비추고 있었다), 파란색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빨간색을 통해 기능과 역할이 다른 벽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후 식당에서 외부로 나와서 하카란다 나무 그림자로 수놓아진 파티오를 감상하였다. 보라색, 핑크색, 노란색, 흰색, 초록색(나무), 검은색(그림자)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색채의 파티오는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되돌아오면서 한 번 더 인상 깊은 부분을 감상하며 투어를 마무리하였다. 건물을 나오면서 떠오른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실 배치에 관한 것이다. 주택을 계획할 때 일반적으로 가장 내밀한 공간에 주침실을 배치하게 되는데 이 주택은 도로에 면한 부분에 실들을 배치하였다. 물론 수영장이라는 사적인 공간이 안쪽에 들어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영장 위쪽에 주침실을 배치하는 등 다양한 조합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럼에도 주침실이 3층이라는 점으로 내밀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또한 식당과 수영장이 함께 계획되었다는 점도 신기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부분은 식당을 1층에 배치해 달라는 건축주의 요구사항이었는데, 수영장이 기능적인 실과 만나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안했다는 측면에서 인상적이었다.
길라르디 주택에서 가장 궁금했고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건축에 색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지로 본 바라간 건물은 감동적이었지만, 색의 사용은 영적인 느낌을 자아내기 위한 것에 그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색을 통해서 공간의 중요도를 결정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등 아주 입체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하카란다에서 시작된 보라색 벽, 물 색상을 강조하는 파란색과 그와 대비된 빨간색, 그리고 노을 진 풍경을 떠올리는 노란색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 이외의 공간에는 하얀색 벽을 통해 공간의 밀도를 결정했던 것이다. 또한 벽에 색을 칠하는 것을 넘어 창에 색을 칠함으로써 시각적인 것을 포기했지만 새로운 빛의 활용에 대해 제안해 주었다. 과거 색을 칠한 건물이 촌스러웠던 점은 그것이 색 그 자체에 집중하였다면, 바라간 건물의 색은 빛을 만나며 감각적인 느낌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앞서 말했듯이 길라르디 주택은 실망하면 어쩌지라는 불안함을 지워버리고 사진보다 더 감동적인 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