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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감성 Oct 24. 2021

우울증

7장

1. 우울증보다 더 우울한 현실

'내가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나와는 꽤 거리감이 있는 병이라고 생각했고, 연예인들이나 삶의 희망을 잃은 취약계층의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구나라고 매체를 통해서 접할 뿐이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그 스트레스를 자책으로 풀어가는 나날들이 많아질수록 머리와 몸은 무거워져 갔고, 회사에 가는 것조차 싫어졌다. 그렇다고 회사 일이 한가로운 것도 아니고 연말이 다가왔음에도 회사는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야근을 하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하지만, 야근을 하는 만큼의 효율이 안 나왔다. 일은 하는데, 시간을 들인 만큼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 마치 챗바퀴를 돌고 있는 듯했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모두 지쳐갔다. 내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힘들 때가 있으면 좋을 때가 있는 거지 이런 것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우울증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팀장님이 병원을 좀 가보라고 심각해 보인다고 하셔서 그제야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1시간쯤 지나니, 정말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내 안에 있던 분노, 슬픔, 좌절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을 지우개로 다 지워버린 것처럼 마음속이 고요해졌다. '그동안 어떻게 생활했던 걸까?', '사람들에게 그동안 내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약 하나로 정신병도 치료가 되는구나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항우울제 몇 알의 효과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났다. 내 원래 자아가 깊은 잠에 빠져든 틈을 타서 또 다른 자아가 내 행세를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항우울제는 그런 나의 원래 자아를 잠에서 깨워주는 역할을 했다.


평소에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이 최우선이라고 건강을 챙기시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는데, 정작 내 몸을 돌보지 않은 것에 허망함을 느꼈다. 남들이 좀 쉬면서 하라고 할 때도 아직 괜찮다고 할 수 있다며, 내 몸이 쉬라고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서 일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 분명히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목적은 잊고 아무 생각 없이 뛰기만 했다. 말 그대로 '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한 일도 결과가 안 나오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몸은 망가지고 정말

'최악'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울증을 치료해주는 약을 먹은 건지, 매트릭스에 나오는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진실의 약을 먹은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우울한 감정들이 사라진 거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에 깨달은 현실이 너무 시궁창 같아서 차라리 다시 약 먹기 전으로 돌아가 진실을 깨닫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오징어게임' 속 오일남의 말처럼 '현실이 더 지옥'이었다.


2. 내가 겪은 우울증의 증상들

전문적인 의학적 지식이나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니, 그냥 이런 증상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1) 기억력 감퇴

원래 기억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특히나 더 기억력이 감퇴되는 듯한 현상을 경험했다. 회의를 한다거나 했을 때, 어떤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회의에서 딴청을 피운 것도 아니고 성실히 회의에 참여했다. 내 업무에 관한 것이니 더 집중해서 들었다. 하지만, 며칠 빠르면 하루 이틀 만에도 기억이 가물가물 해졌다. 그래서 회의 내용과 다르게 일을 처리하며 실수가 늘어났다.


카드를 주머니에 넣어놓고 회사에 두고 온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고, 태어나서 한 번도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는데, 이 시기에 지갑도 잃어버렸다. 생일선물로 받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고, 현금까지 두둑이 들어있던 지갑이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서 다행이지만,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사소한 것들을 자주 깜빡했다.


(2) 산만해진다.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계속 떨어졌다. 일을 해야 하긴 하는데, 의욕도 안 생기고 딴짓에 눈이 갔다. 일을 정해진 일정 안에 해결 못 하는 빈도도 늘어났고, 일 얘기보다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즐거웠다. 내 일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면서 정작 내 일은 하지도 않았다. 예전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뭔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지금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끊어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계속 요청에 응했다. 내 일보다 주변에 일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던 거 같다.


(3) 인지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여러 가지 인지 능력들이 제 기능을 못 한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인지 능력이 떨어졌다는 걸 체감하게 해 준 시그널이 있었다. 바로, 몸과 생각이 따로 노는 걸 느꼈을 때였다. 회사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다가, 2번째 파일을 클릭하려고 하면 3~4번째에 있는 파일이 클릭되곤 했다. 처음에는 피곤한가 보다 했는데, 그런 일이 너무 많이 반복됐다.  단순한 일상생활에서도 몸이 말을 안 들었지만, 업무적으로는 더 심각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해야지 하는데 실제로 행동은 다르게 할 때가 많았다. 이성적으로 조절이 안 되고 순간순간 감정에 충실하게 몸이 움직였다. 특히 업무적으로 질책받아서 욱할 때 그런 충동적인 행동이 강해졌다. 말로는 다시 고치겠다고 하고, 안 고치고 그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과 같이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된 듯 행동했다. 고장 난 로봇이 된 거 같았다.


(4)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저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날 무시하고 있나?'와 같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주변 반응에 예민해지는 게 결국 산만해지는 것과도 이어졌다. 회사에서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주위에 팀원들이 나를 다 무시하고 있는 거 같았다. 눈은 앞에 모니터를 보면서 마음은 계속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투에 꽂혀 있었다. 별생각 없이 한 말들이겠지만, 그 흘리는 말에도 계속 별의별 의미를 부여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어느 날은 팀장님이 나를 불러 세우고, 업무에 대해서 지적했는데 날이 선 말들을 듣고 있자니 현기증이 났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기분과 회사를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속으로 들끊었다. 까딱 정신을 놓으면 쓰러질 거 같았다. 상사의 지적 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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