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특정한 방식의 자아실현

평생 쓸모없이 달려만 있던 가슴으로

by 까치

평생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려 살아왔다. 공부를 잘해야 했고, 예뻐야 했고, 잘 나가는 직장에 다녀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 증명을 했어야 하는데 번번이 실패만 해왔다. 특히 부모님 눈에는 더욱 자랑스러울 것 없는 딸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이 표창을 얻게 되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겠지 그렇게 20대, 30대를 보낸 것 같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하는 중 생각해 보니 모유 수유라는 것은 굉장히 특정한 방식의 자아실현, 가치 검증일 수 있단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 몸뚱이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모두 쓸모없고 귀찮기만 했다. 콧물이며, 침이며, 월경이며, 대소변이며. 그러다 갑자기 30년 넘게 쓸데없이 달려있던 가슴이 다른 생명체를 먹일 수도 있는 정수기(?)로 진화한 것이다. 그 정수기에서 나오는 우유는 영양분이 많아 막 태어난 동물 아기를 먹여 살릴 수가 있었다. 커리어도, 작업도 어떤 뿌듯함을 주었다면, 성장한 인간 한 명으로서 아기에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전에 매달려 오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조금 더 원초적이었다. 아니, 그동안 정수 작동하는 법을 내 몸이 알고 있었는데 한 번도 쓸 일이 없었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고.


모유수유는 공부를 잘하거나 예쁜 옷을 사 입거나, 취직을 한 것과는 다른 결의 성취감. 살아 있는 동물(생물학적)로서 나의 가치가 비로소 완벽하게 증명되는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모유수유뿐만이 아니라 어떤 생명을 자라나도록 할 수 있는 엄마 힘은 거의 신과 비슷한 수준의 전능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따듯하고 말랑거리는 생명체가 내 가슴팍에서 쌔액쌔액하면서 잠이 들면 일로 느꼈던 행복 성취와는 다른 어떤 깊은 뿌듯함이 나를 미소 짓게 하고 있다.


슬픈 그 뒷 이야기:

하지만 모유수유의 고통과 스트레스로 결국 2개월도 안되어 그만두게 되었고 남편과 공평하게 일을 나눌 수 있는 분유수유를 찬양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도전해 보았으니 다행이었고 꽤 만족스러웠다. 할 일을 끝낸 나의 정수기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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