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학과 사무실에서 이메일로, 해고를 결정하는 회의의 첫 단계로 7월 20일 학과 교평회의에 참석하라는 공지가 박 교수에게 도달해 있었다. 조사위원회에서 마지막 조사라고 불러서 하는 짓을 보고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박 교수는 학과에서 온 이메일을 받고 돌아온 저녁, 침대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두 아이의 방학 시작은 7월 30일이었고, 지난 학기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게 된 그의 아내가 다니는 외교대학교 언어중심(센터를 중국어로 표기한 것)의 두 번째 학기는, 8월 말까지 수업이 진행되는 일정으로 막 개강을 한 터였다.
“애는, 그냥 한국으로 들어와 버리라고 하는데요?”
박 교수의 아내는 변호사인 동생과 통화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그냥 한국으로 도망치듯 들어 오라구?”
“네. 어차피 증거도 없이 얘네들이 만들어낸 상황이라 절대적으로 당신한테 불리할 거래요. 당신한테 이로울 게 하나도 없고 그냥 들어오라고 하네요, 얘는.”
“후우!”
처남의 조언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그를 통해 넌지시 자신의 의견을 살펴보는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보다는 긴 한숨이 먼저 나왔다.
“두 가지 모두가 걸려. 아이들도 아직 한 학기도 마치지 않았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학제가 엉망이 되어 버릴 거고, 당신도 이제 경우 중국어 공부하고 재미가 붙었는데 이런 일 때문에 허망하게 죄인처럼 도망치듯 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도 형사 고소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니야. 조금 더 지켜보자. 그 정도로 허접한 쓰레기 나라는 아닐 거야. 아이들도 이제 곧 방학이고 당신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잖아. 경찰이 검찰에 빨리 송치해준다고 했으니까 불기소 처분이 나오면 모두 뒤집어버릴 수 있을 거야.”
한국에서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월급 탓에 한국에서 돈을 가지고 와서 써가면서 생활하는 상황이었지만 아이들과 아내의 중국어 공부를 위해 일부러 연수 왔다고 생각하고 1년 정도만 지내보자는 계획 하고서 온 대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모함을 당하고 야반도주하듯이 한국으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은 그들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박 교수는 믿고 있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18일 뜬금없이 학과에서 또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20일 회의에 직접 출석할 필요가 없으니 나오지 말고 필요한 사안이 있으면 서면으로만 제출하고 끝낼 테니 그리 알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들다웠다. 일이 터지고 나서 자기 학과 내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 대만 특유의 국민성을 발휘하며 연락 한번 없던 그들다웠다. 그리고 연구실이 위치한 연구대루의 1층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친 전 학과장, 곽 교수와 천 위지에의 다정한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은 충격의 장면이었다.
곽 교수는 10년여를 학과장으로 군림하면서 모든 언론의 전면에 드러나는 정치적인 색이 강한 여자였다. 박 교수가 부임하기 직전 해에, 무소불위의 한국어 학과장 권력을 휘두르며 한국의 각종 재단 연구비를 끌어왔고,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대만의 정치적인 인물들은 물론 한국의 감투를 쓴 이들과 막역한 친밀 관계를 유지하다가 제멋대로 연구비를 횡령한 혐의로 재판까지 회부되어 갑작스럽게 학과장 자리를 내놓고 공식적인 석상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교수직에서 짤릴까 두려워 암암리에 그 위기가 넘어가고 한국으로부터 더 이상 추궁을 받지 않도록 암중모색하고 있다는 공공연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박 교수가 부임하고 나서도 공식적인 인사 자리나 식사자리도 없이 그저 홈페이지 사진을 보고 알게 된 얼굴 때문에 연구실 복도에서 마주쳐, 먼저 박 교수가 인사를 건네고 눈인사를 하는 것 외에는 말도 제대로 나눠보지 않은 인물이었다.
박 교수 아내의 표현에 따르자면, 탐욕이 얼굴 가득 차있는 정치적 욕구가 누구보다 강한 여자였는데, 들리는 말로는 최근 한국 측 재단의 연구비 횡령으로 재판에까지 회부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가 이제 겨우 조금씩 회복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터지고 누구보다 먼저 천 위지에를 옆에 끼고 계속 함께 다니는 모습이 박 교수에게 딱 걸린 것이었다. 그녀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지만, 뭔가 뒤에서 몰래 도둑질을 하다가 주인에게 걸린 사람들마냥 경직된 표정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확인된 소식통의 전언으로는, 가장 나이 어리고 말 그대로 어리바리한 현재 학과장은 귀찮은 행정을 처리할 바지 학과장으로 내세운 것일 뿐, 역시 모든 결정이나 영향력은 그대로 곽 교수와 다른 뒷방 늙은이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근접해 보이는 소문들이 기정사실화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뜬금없이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공문을 일부러 보낸, 그들의 의도가 행간에 뚜렷하게 읽혔다. 박 교수는 지체 없이 바로 공식적인 답장 이메일을 썼다.
- 나는 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회의에 반드시 참석하여 내 누명에 대해서 명확하게 해명할 예정입니다. 회의에 참석하도록 할 것입니다.
메일을 보내고 난 박 교수는,다시 한번 성평회의 담당 여자 직원이 줬던 성평회 절차도라는 문건을 펼쳐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대만의 국립대 법규로 정해진 성평회 관련 규정에 따르면, 성평회의 기본적인 조사가 끝나고 그들이 그 안건에 대해 사실관계를 위로올리면, 크게 3단계로 나눠 조사 및 분석, 판단의 절차를 밟게 되어 있었다.
먼저 준비단계였던 성평회의 조사 보고서는 기본적으로 진행하게 되고 3단계 중 첫 번째 단계는, 해당 학과에서 진상을 조사하고 학과 단계에서 보고서를 내는 것이다. 물론 이 학과의 교평회에는 모든 학과 교수들이 반드시 참여하여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한다. 여기서 해당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되거나 강한 의구심이 제기될 경우, 그 내용을 포함하여 중단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의견을 포함한 보고서는 2단계, 소속 단과대학의 회의를 거치게 된다. 이 경우, 각 학과의 학과장과 실질적인 실세라고 불리는 교수, 이렇게 2명씩으로 구성된 교수들이 한 표씩을 행사한다. 2단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작성된 성평회의 의견 보고서를 기반으로 하여, 소속 학과에서 어떻게 그 의견을 판단할 지에 대해 회의를 연다. 여기서 규정상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한 가지 있음을 박 교수는 절차도만을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눈치채지 못했다.
복잡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 내용은 절차도에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진 않았다. 사안을 표결에 부쳐 판단하여 윗 단계로 보내는데, 구성원이 정족수에 부족하게 되면 행정규정의 절차상 문제가 되어 회의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원래 민주주의 회의체의 다수결 원칙을 행할 때, 구성원의 정족수를 채워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이고 불가변의 규정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 관련 규정 1항에 명시되어 있음을 학교 측에서는 박교수에게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 내용은 바로, 2단계 교평회에서 해당 학과의 교수들은 참석할 수도 없거니와 투표권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규정이 생긴 이유는 분명했다. 대개, 학과에서는 당연히 학과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과 달리 사건의 진실을 은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비슷한 이유로 교수가 문제가 되는 사건을 불러일으켰을 때, 가재는 게 편이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정치색이 같은 교수들끼리 일을 적당히 무마할 수 있기에 그 부분을 덮는 것을 '형식상'으로라도 방지한다는 취지에서였다.
예컨대, 외교대 중문과, 그러니까 대만으로 치면 국문과의 동성애자 여교수의 사건이 대서특필되어 옐로 페이퍼를 장식했던 사건이 불과 1년 전에 벌어진 일이 있었다.
남성 역할이던 그 여교수는, 자신의 가르치던 여학생을 애인으로 삼아, 연애를 했고, 심지어 성평회 조사 결과 자신의 연구실에서 동성간의 유사 성행위를 몇 번이나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다른 여학생에게 눈을 돌려 해당 여학생에게 결별 선언을 하자, 해당 여학생이 여교수가 자신을 상폭행하고 성희롱했다며 학교와 언론에 찌른 것이었다. 학교는 개망신을 당했고, 폭탄급의 외모사진이 버젓이 학교 홈피에 올라 있던 여교수는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몇 주간이나 받았던 사건이었다.
결과는, 성희롱과 성폭행, 사실관계가 모두 인정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여교수는 방학기간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것으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같은 문과대에서 불과 1년 전에 일어난 연구실 내의 동성 간의 성행위에 대한 처벌은 품위손상으로 인한 정직 3개월이 다였던 것이다.
박 교수의 결백을 믿고 지지하던 몇 안 되는 남학생이 이 사건을 설명하며 그에게 말했다.
"연구실에서 그 짓을 한 게 드러나도 정직 정도로 끝내는 게 이 나라예요. 그런데 교수님은 아무런 짓도 안 하고 누명뒤집어쓰고 계신 거니까 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해괴망측한 사건을 대학에서 어떻게 처리했는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해당 규정을 왜 간과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박 교수는 뒤늦게서야 변호사를 통해 힌트를 얻게 된다.
교평회의 3단계 구조는, 위로 올라갈수록 직접적인 조사와는 거리가 멀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국가가 아니면서 끝끝내 지들이 국가라고 우기는 타이완 민족의 특성상, 그들은 미국을 필두로 한 민주주의의 제도를 자신들이 상당한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다는 허례허식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콤플렉스가 심했다. 특히, 그 나라의 역대 총통과 유명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해낸 국립대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기들끼리 추켜세워가며 버틴 자격지심에 기반한 요식행위에 해당하는 행정절차가 상당히 많았다.
운동회를 한답시고, 중국 본토 공산당이 하는 사열의식을 흉내 내며 총장의 앞으로 학과별로 행진하면서 경례와 인사를 붙이는 것과 영어 이름을 공용어처럼 사용하고, 심지어 중국을 부정하겠다고, 자기네 국어를 영어로 하자는 데모가 번화가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수준이 낮다고 하는 표현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양태가 버젓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인 3단계에서는, 전체 대학 학과를 통합한 대학본부 회의에서 결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는 이른바, 정치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교수들이 대거 참여한다. 나름 코딱지만 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라지만, 워낙 인력풀이 협소하고 수준이 낮다 보니, 그들끼리의 권력 암투가 굉장히 심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언감생심 여당과 야당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 여부를 밝히기 어려운 당연한 상식이 이 나라(정확히는 그냥 ‘땅’)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즉, 자신이 마치 당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처럼, 이미 당색을 도드라지게 표시하고 그 당색에 맞춰 서로 정치색을 대립각으로 하여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허접한 문과대학이나 사범대학은 논외로 하더라도, 법대나 경영대처럼 나름 해외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왔네 하면서 정치적인 한 자리를 언제 받아오나 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정치교수들이 많아 안건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치열한 정치적인 암투가 이 회의에서는 종종 일어나곤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 마디로 총평을 하자면, 그들은 이 사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건을 통해 상대방을 혹여 공격할 수 있느냐, 혹은 현재 이 사건을 들고일어나 유명세를 떨겠다고 했던 여자 국회의원을 지지하느냐 뒤집느냐, 아니면 공공의 적이자 문제가 되는 한국을 씹어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을 어떻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 것이냐 하는, 박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어이없기 그지없는 이전투구의 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박 교수는 이러한 정황이나 그들의 지저분한 암투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정보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지근거리에 있던 학과 교수들이라는 것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그를 내치고 자신들에게 화살이 향하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배후는, 그 학과의 OB랍시고 협박을 통해 강사직을 유지하며, ‘다들 내 후배잖아, 그리고 내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잖아.’라고 떠벌이며 이 사건을 키웠던 주영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