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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1. 2021

하나후다(花札)와 화투(花鬪) -3월

벚꽃에 막(幕)- 櫻に幕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410


“み吉野の桜散りにけり あらしもしろき春のあけぼの”

 

“요시노 산의 높은 봉오리에 핀 벚꽃도 흩어졌다. 산바람도 하얗게 물들일 정도의 봄의 새벽”

3월의 그림에 해당하는 내용은,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ごとばてんのう)의 시구에서 유래된 것이다.

 

3월을 상징하는 그림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도 이미 ‘사쿠라’라고 불리는 ‘벚꽃(櫻)’이다. 벚꽃은 일본의 고전시가에서 봄을 상징하는 계절어(季語)로 <만엽집(萬葉集)>4516수와 <팔대집(八代集)> 9502수 중에서 356수나 언급될 정도로 빈도수가 높은 ‘화류(花類)’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시작되어 귀족들의 사치 놀이문화로 유래가 오래된 벚꽃놀이는, 하나후다(花札)가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에도(江戶) 시대에는 서민들에게까지 확산되어 일본의 전국민적으로 벚꽃 축제를 상당히 많이 즐기고 일반화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도호쿠 지역을 제외한 본토의 대부분 지역에서 3월을 즈음으로 벚꽃이 개화한다. 한국의 화투에서 광(光)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면 뭔가 까맣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인다.

벚꽃을 둘러싼 것은 ‘만막(幔幕)’이라고 하는 것으로, 식장·회장 따위의 주위에 치는 장막을 의미한다. 흔히 일본 사극 등에서 볼 수 있는, 가게 앞 등에 걸려있는 벚꽃 무늬 장막도 모두 그것의 일종에 속한다.


이 장막의 원래 사용목적은 군사장비용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즉, 군대가 원정을 나갔을 때 지휘관의 처소(자는 방과 접견실, 회의실 등을 모두 포함)를 두르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래 <묵자(墨子)>에 처음 언급되는 표현인데, 이 중국의 문화가 일본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3월의 그림의 상징 대표 기호는, 식물은 벚꽃이고 사물은 만막이다. 그런데 앞서 1,2월에서 봤던 동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만막의 안에서 봄맞이 벚꽃놀이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는 사람들을 일일이 그리지 않고, 생략하였는데 사람이 그렇게 모여있는데 동물들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동물이 없는 것이다. 나름 상당히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하나후다(花札)의 그림에 보면, 역시 한국 화투의 홍단에 해당하는 띠가 있는데, 이번에는 쓰여있는 글씨가 앞서 살펴본 글씨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띠에 ‘みよしの’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는데, 벚꽃으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로 꼽히는 나라현의 요시노(吉野) 산의 아명(雅名)이 ‘요시노’라는 이름 앞에 존경 혹은, 공손의 의미를 뜻하는 접두사 み(御)를 덧붙여 쓴 것이다.


일본 나라현에 소재하고 있는 요시노(吉野) 산을 지칭한 것이라는 근거  하나는, 앞서 이 글의 문두(文頭)에서 살펴보았던 시구의 첫머리에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시노(吉野)산

사실은, 메이지 시대까지 3월의 그림에서 ‘벚꽃(사쿠라)에 막’ 은 세로 줄무늬였다. 이후 어느 때부터인가 자연스럽게 가로 줄무늬가 변화한 것이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화투 금지령 폐지를 결정했기 때문에 하나후다(花札)를 제조하는 가게가 급속히 늘어난 것은 지난 편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많은 하나후다(花札)의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하나후다(花札)를 만드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판목을 간소화하게 된다.


원래 판목은, 1색=판목 1장이라고 하는 판화의 규정상 색도 수가 많은 세밀한 무늬만큼 판목의 매수도 많아지고, 마무리의 정확성과 아름다움 등 직인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조금이라도 그 규격에서 벗어나면 상품성을 잃어 판매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 화투의 그림은 여러 색을 겹쳐 눌러, 복잡하고 아름다운 색깔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또, 색이 고르게 분포하게 되려면, 도장을 누를 때, 숙련된 장인의 기술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 어려운 부분을 간소화(판목의 매수를 감소)한 것으로 숙련된 장인이 아니어도 많은 표지를 단시간에 양산할 수 있게 시스템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후다(花札)는 대량 양산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매화 다음에 벚꽃을 가져오는 것은 화류(花類)로 이어지니 자연스럽긴 한데, 굳이 동물을 빼면서까지 사람을 그리지 않으면서 굳이 왜 이 3월만 장막을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화조풍월(花鳥風月)이라면 당연히 3월을 대표하는 새가 나와 조류(鳥類)를 이어줘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1월과 2월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운을 맞추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만개(満開)에 만막(幔幕)’이라고 해서 ‘만’이라는 두운을 밟기 위해 짝을 맞출 그림을 찾다가 그렇게 했다는 설과 벚꽃의 ‘사쿠라’와 상춘객들이 망막을 치고 마시는 술을 의미하는 ‘사케’의 두운을 맞추려고 했다는 설이 있는데, 두 가지 모두 두운을 맞추기 위해서 그리 되었다는 설명이다.

또, 3월은 적단(赤短; 홍단)에 ‘미요시노(みよしの)’란 문구가 들어 있지만, 다른 달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3월에만 들어가 있다는 점도 의문이 될 수 있으나, 앞서 문두(文頭)에서 살펴본 것처럼 3월에 인용된 시를 지은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 ごとばてんのう)’의 이름인 ‘고토바(後鳥羽)’에 새의 뜻이 들어가 있고, 와카의 시작 첫 부분에 ‘미요시노(みよしの)’를 적어 다른 시가 아닌, 고토바상황의 ‘미요시노’ 노래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일설도 있다.


벚꽃 놀이를 즐기는 정서는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통문화와 관계없다.

일본은 1869년부터 왕실에서 국화(菊花)를 국화(國花)로 정식 결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사쿠라를 일본의 국화(國花)로 알고 있는 이들은 착각을 하거나 잘못된 지식을 전달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사쿠라(일본 벚꽃)는 일본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국가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에도 벚나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 제작된 팔만대장경의 판들이 60%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졌고, 조선시대에도 벚나무 껍질로 활을 만드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활용가치가 높은 나무로 많이 심어졌고 그 역사도 길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의 북벌론이 언급되면서 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하려고 했던 기록도 있는데, 당시 심은 벚나무들 중에서 화엄사 내의 300년 된 올벚나무도 있다.

화엄사 만월당 앞의 벚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에 벚꽃놀이를 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없다. 이 벚꽃놀이의 문화는 일제 강점기 이후에 자리 잡게 된 확실한 일본 문화의 잔재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벚꽃놀이 메카가 된 진해라는 도시의 벚꽃도 일본이 진해에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군항을 건설하게 되면서 이때 도시 미화용 나무로 심게 한 것이 바로 왕벚나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해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일본군을 무료 7차례나 격퇴한 것을 유명한 항구로 ‘웅포’라고 불렸었다. 한일의정서라는 합의문서에 의해 오늘날의 해군기지의 항군, 군항 진해가 탄생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광복 이후, 일제의 잔재라며 마구 베어내고 심각한 훼손을 하는 촌극도 벌어졌었는데, 자신의 쿠데타 이후 도시 미관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벚꽃을 식수하라고 지시한 그 옆동네 출신의 박통이, 1976년 4월 진해를 방문했을 당시, 이 참에 진해를 세계 제1의 벚꽃도시로 가꿔보라는 직접적인 ‘분부’를 내려 그 말 한마디에 민, 관, 군이 동원되어 다시 벚나무 심기 운동을 벌여 현재 12만여 그루의 벚나무를 확보하게 되어, 현재의 벚꽃놀이의 메카로 등장하여 봄마다 상춘객들로 붐비게 된 것이다.


참고로 서울의 여의도가 벚꽃의 메카로 된 이유도 벚꽃 사랑이 지나쳤던 박통의 분부에 의해 당시 심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강변북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뒷길에 대량 식수되었던 왕벚나무들은 후지쯔, 도쿄 항공 등의 일본 회사들과 재일교포의 기증으로 이루어진 묘목들이었다. 이들이 1960년대부터 진행 시에 기증한 묘목의 수는 자그마치 6만 그루나 된다. 우리 국민들이 일제를 증오하며 잘라냈던 그 벚꽃나무를 일본에서 묘목까지 기증받아 공수하여 다시 심게 된 것이다.

제주 애월읍 왕벚꽃터널

정작 벚꽃이 일본에 퍼지게 된 것은, 원산지가 제주도로 되어 있다. (실제 일본의 기록에도 자기네가 직접 제주도가 벚꽃의 유래지라고 적은 기록들이 적잖이 보인다. 아마도 제주도를 자신들의 나라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버젓이 적었을 확률이 높다.) 이 사실은 식물학자들 사이에는 이미 공인된 사실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일본이 가져가서 심은 것이 유래가 되어, 그 나라를 상징하는 이미지로까지 확대되어 국화(國花)라는 오해까지 받게 된 것이다.


조선의 수투가 유럽의 카르타가 되었다가 다시 일본의 하나후다(花札)로 변형 탄생하고 그것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화투가 되는 과정과 묘하게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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