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으로는 ‘에탄올을 음료화한 것을 통칭하는 단어’를 술이라 부른다. 주세법(酒稅法)에 의하면, 술이란, ‘에틸알코올이 섭씨 15도 기준으로 부피 대비 1% 이상 함유된 음료 또는 이를 분말화한 상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술은 인간의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늘 인간과 함께 해왔다. 술이 ‘신의 음료’로 불리던 그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술은 다양하게 인간의 삶에 문학에 예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왔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음식이라고 여겼던 술은, 최소한 대한민국 법령상 식품에 속하지 못하였다. 2013년 7월이 되어서야 식품위생법 개정으로 인해 비로소 식품으로 인정받는 우여곡절 많은 사연을 가지고 이제까지 이어져왔다.
술은 어디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술’이라는 단어의 흔적이 처음 문헌에 보였던 시기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압록강 이북의 ‘풍부성(豐夫城)’이라는 고장이 원래 고구려의 ‘소파홀(肖巴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豐은 글자의 상형으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술잔 받침’이라는 뜻이 있어 그 의미가 전성되면서, ‘소파(肖巴)’가 ‘술’의 고구려 말 어형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신라의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을 ‘서발한(舒發翰)’ 혹은 ‘서불한(舒弗邯)’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를 신라시대 때 훈차하여 ‘주다(酒多)’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多’는 ‘많다’의 옛말 ‘하다’의 어간을 빌려 ‘한’~‘간’을 표기한 것으로 보이므로, 술을 뜻하는 酒가 신라어 ‘서발’ 또는 ‘서불’로 불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103년 송나라 사신, 손목(孫穆)이 고려를 다녀온 후 저술한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는 “고려에서는 술을 ‘수발(酥孛)’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는 다시 ‘수ᄫᅳᆯ’이라는 변형을 거쳐 《석보상절》에서는 ‘수을’로 약화되어 나타났고, 그 이후로 ‘수을→수울→술’로 변화면서 오늘날에 사용되는 ‘술’이라는 단어로 정착되게 된 것이다.
술의 고어형 ‘수블’이 술을 발효시킬 때 끓어오르는 듯한 모습에서 물이 불처럼 끓어오른다고 하여 수(水)와 불을 합친 것에서 유래했다는 민간 신앙 같은 헛소리가 제기된 바 있으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끼워 맞추기 이설일 뿐이다.
한자로는 酒(술 주)라고 쓰며, 삼수변(氵)에 ‘열 번째 지지 유(酉)’를 조합해서 만든 글자이며, 酉 또한 본래 술 단지를 상형하여 만든 글자이기 때문에 술과는 매우 밀접한 글자이다.
다르게 부르는 표현도 상당히 많은데, 예컨대 불교계에서는, 완곡하게 곡차(穀茶), 반야탕(般若湯) 또는 지수(智水)라도 부른다. 반대로 술을 경계하는 의미에서는 미혼탕(迷魂湯), 화천(禍泉)이라고 표현한다. 곡차는 말 그대로 ‘곡물로 빚어낸 차’를 뜻하며, 반야탕(般若湯)의 반야(般若)는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로 지혜를 뜻하는 ‘prajna’의 의역이다. 즉, 반야탕(般若湯)은 ‘지혜의 물’ 정도의 의미를 지니겠다. 술에 취하면 속세를 벗어난 느낌을 준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지어 불렸다고 한다. 그것을 한자를 표현한 것이 바로 ‘지수(智水)’이다.
정반대로 미혼탕은 ‘사람의 혼을 미혹하는 물’, ‘지혜를 흐리게 하는 물’이란 의미이고, 화천은 ‘모든 화의 원천’이라는 의미를 두어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다.
술은 환각제인가? 진정제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술은 진정제에 속한다. 그런데 그 말장난인 것이 신경안정제나 진정제는 동시에 마약성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구분된다. 즉, 환각제나 마약으로도 불린다는 것이다. 대마초(마리화나)나 양귀비꽃(아편)에서 추출하는 진통제인 모르핀, 모르핀을 정제해서 만드는 헤로인 같은 약품과 마약들도 이러한 진정제에 속한다. 때문에 진정제란 의존성과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현재 세계 보건기구(WHO)에서 제시한 알코올 적정 섭취 권장량은 1일 기준 남자 40g(소주로 5잔), 여자 20g(소주로 2.5잔)이다.
소주잔에 따른 소주 1잔과 맥주잔에 따른 맥주 1잔, 그리고 스트레이트 잔에 따른 양주 1잔은 신기하게도 알코올의 수치가 비슷하다. 보통 약의 부작용을 설명할 때 ‘술 x단위를 마실 경우~’라고 하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단위’가 바로 이 1잔을 말한다. 알코올 양이 비슷하므로 그냥 ‘단위’라고 통합시켜 언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신의 음료’로 불렸던 최초의 술은 포도주이다. 다만 기록이나 유물로 실증되는 것이 포도주라는 것이고, 그 이전에도 그 외 과일로 만든 원시적인 술이 있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코끼리나 원숭이들도 과일을 구덩이에 모아둔 채 발효가 되도록 일정 시간 기다리고 나서 마시는 문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은 인류의 탄생과 그 역사를 함께 한 최초의 음료라는 말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기원전 4,000~3,000년 경 지중해 동남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기록이나 유물을 보면 이때 이미 포도주가 주된 교역 상품으로써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술에 물을 타서 양을 속여파는 상인은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대한민국 뒷골목 장난질 똘마니들 잘 보고 있나? 사형이란다~!) 기원전 3,150년 경의 파라오의 무덤에서 포도주 단지가 발견되었다. 성경을 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포도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대량 재배되는 주요 작물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술은 과실주에서 어떻게 발전하게 되는가?
비교적 가장 최근에 개발된 것이 ‘곡주’라 본다. 술은 기본적으로 당분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얻어지는데, 당분이 부족한 곡물을 술로 발효시키려면 전분을 당으로 만드는 당화 과정이 추가로 필요하기 때문에 조금은 단순한 과정인 과실주나 꿀벌술보다 더욱 발달된 제조기술이 필요하다. 이러한 곡주의 기원은 여자들이 사탕수수로 이를 닦고 쌀을 씹은 것을 항아리에 모아 담근 처녀주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침의 아밀라아제로 쌀의 전분이 당으로 분해되어 발효가 가능해지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를 담가 마셨다. 다만 지금의 것과는 형태가 꽤 다른데, 찌꺼기를 거르지 않아 거의 죽 같은 형태에 속이 빈 식물 줄기 등으로 만든 빨대를 꽂아 즙만 빨아 마시는 형태였다.
술 마시면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은 왜 짐승으로 변신하는가?
<탈무드>에 나오는 술 관련 이야기를 보면, 아담이 처음으로 술을 빚었을 때 처음 보는 음료수에 호기심에 이끌린 악마가 다가와서 자신에게도 한 모금 나누어줄 수 있느냐고 청한다. 경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던 아담은 흔쾌히 허락했고 술을 마시고 그 맛에 감동한 악마는 아담에게 ‘나도 이 멋진 음료수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주고 싶은데.’라고 말한다. 아담의 허락을 받은 악마는 술을 담글 포도가 키워지는 밭에 거름을 뿌려주겠노라며 거름을 찾으러 떠났다. 악마는 양, 사자, 원숭이, 돼지의 4마리 짐승을 잡아 돌아온다. 그리고 포도밭에 그것들의 피를 거름으로 부었고, 포도는 모든 인간이 술을 마실 수 있을 만큼 풍성하게 자라났다. 그 뒤 동물의 피가 갖는 본성 탓에 부작용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포도주를 마실 경우 처음엔 양(순해지고)→사자(사나워지고)→원숭이(춤추고 노래하고)→돼지(더러워지는)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개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판 한정이다.)
밀(또는 보리)로 술을 만들게 된 한국의 숨겨진 이야기는 또 조금 다르다. 최초의 밀을 심을 때, ‘사람 셋을 죽여서 그 간을 거름으로 주라.’는 계시(?)를 받은 농부가 언덕에서 낫을 들고 기다렸는데, 처음 나타난 것은 선비였고, 다음에 나타난 것은 스님이었고, 마지막 나타난 것은 미치광이었다. 농부는 그 셋을 차례로 살해한 다음 배를 째서 간을 꺼내 거름으로 쓰게 된다. 그렇게 길러진 것이 밀(또는 보리)이어서 배를 짼 자국이 세로선으로 남아있고, 그것으로 술을 빚으면 죽은 세 사람이 차례로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비처럼 점잖고 다음에는 중이 부처님 앞에 공양하듯 자꾸 남들에게 권하고 마지막으로는 미치광이가 된다는 비유가 녹아든 것이다.
‘주도(酒道)’는 왜 강조되는가?
술을 마실 때, ‘주도(酒道)’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무 단어에나 ‘도(道)’를 붙이는 일본스러운 관습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술이라는 것이 사람의 예기치 못한 본성(?)을 드러내게 되고 이성줄을 놓게 만든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술이 깨고 나면 술이 취했을 당시의 실수에 대해 수습하는 것보다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범과 수양은 당연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도(酒道)는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술을 마실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암묵적인 가르침이 한 가지 있었다. ‘상대의 주량의 한계가 있음을 먼저 명심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자신을 자제하라고 가르치지만 굳이 상대방에 실수하게 만드는 여지를 두지 말라고 제한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주당(酒黨)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세 잔 이상 돌리면 배려할 줄 모르고 천박한 사람이라고까지 비난하였다. 물론, 지켜지지 않았다.
청백리의 대표격이자 술꾼으로 이름난 박수량(朴守良)에게 성종이 은으로 만든 작은 술잔을 내리며 이걸로 하루 1잔만 마시라고 하자 술잔을 망치로 얇게 두드려 펴 사발로 최대한 넓혀서 거기에 술을 부어 들이켰다는 야사는 주당들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한편, 태종이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왕세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가 ‘보(효령)는 술을 못 마시는데 그래서야 어디 외교나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는 야사 역시 주당들에게는 전설처럼 원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미 조선시대 때부터 술을 마실 줄 아는 것이 접대의 기본이라는 점이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야기.
가난한 선비는 술이 비쌌던 탓에 백탕(맹물)을 마시면서도 취한 척 낭만을 즐겼을 정도로 술을 풍류로 생각했다. 성웅으로 칭송받는 충무공 이순신도 실제로는 부하들과 술내기하고 술에 취해서 함께 아무렇게나 잤다는 기록이 전한다. 물론,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은 “술을 마시면서 시국을 논하고 풍류를 즐긴다는데, 모두 핑계에 불과할 뿐이고 술에 취하면 상하귀천 구분 없이 그저 개가 될 뿐이다.”이라며 당시 선비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술판에서 보였던 행태를 현실주의적으로 비판했다.
<삼국지> 같은 동양의 고전이나 무협지를 보면 술을 독째로 들이켜는 모습으로 특정 인물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장면이 종종 보이곤 하는데 그 당시 술은 지금의 중국 독주처럼 실제로 독한 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맥주보다 약간 높은 정도의 수준일 뿐이었다.
술을 만들 때, 거르는 기술도 발달하지 않아서 큰 술단지를 손님상 가운데 놓고 국자로 조금씩 위의 맑은술만 뜨는 방식으로 마셨다고 한다. 일례로 고증이 잘 된 중국 시대극을 보면 시종이 국자로 떠주는 방식으로 술을 마시고, 결코 술병에 담아서 마시지 않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