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첫 단추다
이전에 철학과 역사, 고전 입문에 대해서 글을 써봤다. 저 세 가지가 제일 입문하기 어려워하는 책들이라 먼저 적었던 것이고, 실제 입문을 권하는 장르 단계는 일반 문학 -> 가벼운 철학책 -> 고전 문학 -> 가볍게 쓰인 지식 책(역사, 경제, 철학, 과학 등등) 순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책으로 어떤 문학책이 좋을까? 그 이야기를 지금 해보려고 한다.
정말 명서를 많이 쓴 작가님들이긴 하지만, 초심자들에게 추천하지 않는 작가님들이 몇 분 계시다. 한국문학 기준으로 설명해 보겠다. 요즘 한강 작가님이 노벨상을 받으면서 초심자들이 한강 작가님의 작품부터 시작하려고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강 작가님 작품을 첫 책으로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특히 채식주의자는 더더욱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1. 김진명/김훈 작가님: 두 분 모두 굉장한 흡입력을 가진 작가님들이란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거나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2. 박경리/박완서 작가님: 아름답고 토속적인 어휘가 많이 나온다. 이런 어휘가 많이 나온다는 건 초심자들이 읽기는 많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
3. 한강 작가님: 어휘가 유려하고 주제가 거창하다(역사적 상처 안에서 인간의 상처를 톺아보는 스토리들), <채식주의자>의 경우 작품 분석을 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채식주의자 깊이 읽기>와 같은 책들이 존재할까.
4. 마이클 센델/유발 하라리 작가님: 읽고 싶다면 지대넓얕 같은 상식 도서를 읽은 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위에 썼듯, 한강 작가님의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심심찮게 등장하는 현상이다. '노벨상을 받았다는데, 왜 나는 읽히지 않지? 난 아직 멀은 건가... 역시 난 독서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이 저하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니다. 꽤 많이 다독하신 우리 엄마도 한강 작가님 작품은 안 읽으신다. 읽고 나면 그 특유의 어두움이 찌꺼기처럼 남아 힘들다고.
이 주제에 대해 두 가지 실례를 들어 이야기할 수 있겠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각광받지 못했다. 그러다 몇 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가 명작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영문학 3대 비극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톨스토이는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소문났지만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왜 톨스토이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냐고 항의까지 했음에도 말이다.
상을 받았다거나 많이 팔렸다는 것은 그저 현재 사람들의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세상에서 제일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나한테 안 맞을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못 읽을 수도 있다.
신빙성을 덧붙이기 위해 실제 작가였던 페르난두 페소아가 남긴 말을 인용해 본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은 없다.
그러니 남들이 읽었다는 걸 따라 읽지 말고, 직접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찾아 나서자.
굵은 책 중에도 쉬운 책이 있고, 얇은 책 중에도 어려운 책은 반드시 있다. 하지만 내가 굵기로 견적을 내보라고 한 이유는 성취감 증진에 있다. 얇은 책일수록 더 빨리 완독 할 수 있고, 완독에서 오는 쾌감이 앞으로 독서를 해내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처음 읽을수록 굵기를 신경 쓰라고 하는 것이다.
위에 써놓은 비추천 작가 리스트에 있는 분들은 대부분 어휘가 유려하다. 단조롭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유려하다고 말하는 어휘들은 '아름다운' 어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큰 역사적 사건이나, 인간 내면에 대한 탐구를 한 책일수록 추천하지 않는다. 심오하지 않은 가상 세계관에서 가벼운 스토리가 진행되는 도서들을 추천한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그 문체와 심리 묘사 방법에 있다. 일단, 단순한 문체의 책을 추천한다.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는 짧은 문장들로 이뤄진 책들 말이다. 아름다우면서 단조로운 문체면 이상적으로 좋은 책이지만, 그런 문체를 가진 책은 드물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단조로운 문체의 책을 추천한다.
표지가 예뻐서 기억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그 친구가 극초반에 읽었던 <보건교사 안은영>과 <해가 지는 곳으로>가 이 시리즈에 속한 작품들이다. 문체나 어휘가 많이 어렵지 않고, 젊은 작가 분들이 썼다 보니 대개 신선한 소재를 바탕으로 쓰여 있다. 분량도 많지 않아 초심자를 위한 시리즈로 추천한다.
평대에 있는 소설책을 추천한다. 소설은 평대에 있을수록 쉬울 확률이 높다. 특히, 가독성 좋은 책이 유행하는 요즘에는 더더욱. 세계문학이냐 한국문학이냐의 여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평대에 있는 현대소설을 읽어라.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가는 일본의 히가시노 게이고, 한국의 김애란 작가님과 최은영 작가님, 정세랑 작가님을 추천한다.
굳이 소설을 추천하고, 시를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시는 소설에 비해 어휘 수준이 높고, 함축적이어서 직관적으로 의미를 파악하지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는 소설을 읽어본 후 독해력이 높아졌을 때 읽을 것을 권한다.
여기까지 책 고르기에 대한 조언이었다. 서점에서 하나하나 읽어본 후 고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무엇을 읽어볼까라는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 분들을 위해 감히 조언을 드려봤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며, 따라서 독자에 따라 안 맞을 수 있음을 고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