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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Dec 29. 2021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길고 쉽지 않은 마라톤


그림책을 만드는 건 글과 그림을 같이 작업하는 프로젝트든, 글을 받아서 그림만 완성하는 작업이든 결코 단시간에 완성이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출판물을 만드는 과정은 최소한 4개월~1년에 거친 매우 긴 마라톤이고, 대개 생계를 위해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에 작가로서 시간 안배를 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특히 그림책은 40페이지가량 되는 연속되는 일러스트를 글과 같이 엮은 작업이기에, 독자가 작품을 보는 흐름 (대개 페이지 넘김 방향)과 캐릭터들의 통일성을 같이 생각해서 작업해야 한다. 대개 이런 출판 작업은 알다시피 작업 과정이 대개 정해져 있는데, 내가 어떤 식으로 메일로 오퍼를 받고 완성까지 마치는지를 잘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샘플 작업



외국의 그림책 의뢰는 주로 내가 포트폴리오로 보낸 메일 주소를 통해 오게 된다. 아트디렉터들은 현재 출간을 고려중인 글 작품들을 추린 다음, 그 작품에 잘 맞을 것 같은 그림작가를 찾게 되는데 더러는 에이전시에 문의해보기도 하고, 작가들로부터 메일이나 우편으로 받은 포트폴리오를 잘 갖고 있다가 메일 주소로 연락을 하기도 한다. 대개 ‘Project Offer’라는 제목으로 연락이 오며 대강의 프로젝트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메일이 온다. 출판사마다 다르지만, 메일 문의와 동시에 글 script를 같이 첨부해서 주는 경우도 있고 대강의 내용만 알려준 이후 샘플까지 내게 요청한 다음에야 실제 글 원고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작품이 이미 많이 알려진 작가의 경우엔 모르겠지만, 대개 신인의 경우 출판사가 작가의 역량을 알아보고 글 작품의 스타일에 잘 맞출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몇 개의 샘플을 작가한테 요구한다. 샘플비는 천차만별이지만, 대개 큰 회사들은 알아서 샘플비를 같이 책정해서 보내는 편이고 작은 인디 출판사들은 작가가 먼저 요청해야 샘플비를 챙겨주는 것 같다. 대개의 경우 샘플까지 요청하고 나서 계약이 무산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샘플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 출판사가 나에게 일을 확실히 맡길 생각으로 연락했다는 거라고 생각하면 무방하다.


샘플 내용은 출판사가 먼저 제시사항을 주는데 대개 대략적인 캐릭터 디자인, 그림책 콘셉트를 잡기 위한 작은 일러스트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캐릭터 디자인 샘플 작업. 여러 헤어스타일로 그려봤다.



2. 계약서 검토 + 사인




예전에는 정말 어려운 법률 영어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워서, 예술인 복지재단에 요청해서 외국 출판법에 대해 아시는 전문 변호사 분에게 법률자문을 구한 적 까지 있었다. (이것도 변호사님의 스케줄 때문에 2,3주는 기다려야 한다) 이제는 법률 계약서에 자주 나오는 출판 용어들에 익숙해지고 나서부터 혼자 계약서를 검토하는 게 익숙해졌지만, 법률용어에 대해 잘 모른다면 이런 복지재단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아무리 영어를 많이 공부했어도 의학용어나 법률 용어 같은 전문 단어들은 매우 생소하고 계약서의 조항들도 문장이 아주 길기 때문에 이해하기 아주 어렵다. 특히 우리가 자주 접했다고 생각하는 쉬운 영단어가 법률 쪽으로는 전혀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 이런 계약서들은 구글 번역과 네이버 사전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시간을 들여 오래 읽어봐야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구글 번역은 법률 계약서를 세련되게 번역하지 못했는데, 많은 발전을 통해 거의 전문번역가 수준으로 번역이 가능하니 자주 써서 여러 번 검토해보자. 보통 한 계약서가 오면 최소한 8페이지-20페이지 정도의 깨알 같은 조항들과 함께 오게 되는데, Work-For-Hire 방식의 고용형태의 경우에는 통상 Non-Disclosure Agreement (통상 NDA 계약서)와 미국의 세금 관련 서류인 W-8 BEN와 같이 사인한다. 이 NDA 계약서는 보통 회사의 피고용인들이 하는 계약서와 비슷한데 작업 도중 계약서상의 자세한 기밀사항 등의 유출 방지를 위해 자주 작성한다. W-8 BEN 은 미국 출판사와 작업하는 경우 반드시 쓰게 되는데 해당 외주 작가의 국가에 따라 적어야 하는 코드가 달라지니 정확하게 기입해야 한다. 이런 모든 서류를 검토하는 데에는 최소 하루 이상 걸리니, 시간을 두고 잘 검토해서 1-2주 안에 사인을 해서 스캔을 하고 PDF로 떠서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면 된다.


영국의 경우엔 자필 서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서문으로 작성해서 EMS로 보내야 했지만, 미국의 경우는 워낙 출판사가 다국적 작가들과 협업을 많이 하고 땅덩어리가 넓어서 그런지 디지털 시그니쳐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계약서상에 문제가 없다고 서로 합의되면 출판사 관계부서가 작가에게 디지털 사인을 할 수 있는 사이트 링크를 메일로 보내는데, 그 링크로 들어가 디지털 인장을 찍으면 계약이 완료되는 간편한 방식이다. 난 개인적으로 디지털 방식을 선호하는데, 서면 계약서는 가끔 잃어버릴 수도 있고 위조가 가능하지만 디지털 사인은 사인 날짜가 디지털로 영구히 기록되어 사이트에 보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 들어가서 계약서를 다시 출력할 수도 있고, 디지털 사인을 주관하는 제삼자가 끼어있기 때문에 서면 계약서보다 더 믿을만하지 않나 싶다.



금액은 주로 2-3번에 걸쳐 받게 되는데, 받는 방식은 다양하다. Paypal이나 Wise 같은 디지털 Borderless Bank를 이용한 적도 있고 (대개 선입금이 적은 경우), 은행 간 직접 송금 (Wire Transfer)도 해봤으며 직접 수표 (Check)를 우편으로 받아서 국내 은행에서 수표를 추심하는 케이스도 있다. 페이팔 같은 경우는 바로바로 송금이 되지만, 은행 간 송금은 최소 1주일 정도가 걸리고 특히 외화 수표를 추심하는 경우 1달이 걸리므로 먼저 작업하면서 마음 편히 기다리는 게 좋다. 주로 선입금을 본 작업 전, 그리고 파이널 작업 후에 두 차례 나눠 받는데 금액이 큰 경우엔 스토리 보드 작업 후에 한번 더 나눠서 받기도 한다. 너무 나눠 받는 횟수가 많으면 돈이 안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독촉을 해야 하는 고역이 있으므로 3번 까지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세금의 경우 나는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에 낼 세금은 없지만, 내가 한국에 내야 하는 세금이 있으므로 5월 말의 종합소득세 신고 날에 모두 합산해서 세금을 내면 된다.


외국의 경우 큰 출판사일수록, 또 금액이 클수록 입금이 되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무래도 부서 안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외국 자체가 휴일이 많고 일이 느려서 입금 시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개 입금 요청 후에 2주 정도의 기간을 두는 것이 보편적이고, 데드라인은 1달 까지가 마지노선인 것 같으니 그 이후까지 돈을 안 준다면 어떻게 받아낼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대개 늦어질지언정 안주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안심하자!



3. 스토리보드 작업




계약금까지 받고 글 스크립트를 받으면서 본격적 스토리 보드 작업이 시작된다. 알다시피 스토리보드는 본 작업이 진행되기 전의 설계도로, 어떤 구도와 어떤 캐릭터를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지 구성하는 복잡한 작업이다. 그래서 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말보다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이너’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는데, 스토리 보드가 이 전반적인 디자인을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대개 2개월 내외로 끝내는 편인데, 작업이 잘 나오지 않는다면 더 걸릴 수도 있다.


스토리보드에서 마음에 드는 구성이 안 나오면 빨리 본 작업에 들어가도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작은 섬네일이나 아주 러프한 선으로 시작해서 구상하다가, 구도에서 아트디렉터의 승인을 받으면 좀 더 디테일을 구체화시켜 묘사하고 여기서 또다시 수정이 들어간다. 조각 작품들도 처음에 커다란 돌이나 찰흙에서 시작해서 점차 세부적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스토리보드도 같은 방식을 따른다. 대개 많은 한국 작가들이 섬네일로 작은 더미북을 여러 개 만들어서 작업하신다. 하지만 나의 경우 애니메이션 콘티 작업처럼 빠른 작업을 위해 큰 종이를 4-6개의 페이지로 쪼개서 빠르게 그려낸다. 한 화면에 4-6개의 페이지를 볼 수 있으니 대강의 흐름을 알 수 있고 페이지 별로 관리가 편해서 자주 이렇게 작업하는데, 빠른 반면에 실제 출판물로서 어떻게 보일지 실물로 느껴볼 수 없으니 그 부분은 조금 아쉽다.


그리고 출판물의 특성상 더블 페이지의 경우 중앙 부분이 접히게 되는데, 접히는 부분에 중요한 요소를 넣지 않도록 비껴서 넣어야 한다. 스토리가 지루하지 않게 Vignette (삽화) 형식의 그림으로 숨통도 트이고, 캐릭터를 자주 줌아웃시켜서 입체감 있는 구도로 묘사해야 한다. 또 이야기의 흐름이 페이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잘 흘러갈 수 있도록 독자가 어떻게 감상할지에 대해 신경 써야 한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그림책이 아니라 영화나 애니메이션 콘티를 짜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실제로도 비슷하다). 한 페이지가 크게 바뀌면, 그 페이지 앞뒤의 흐름도 잘 신경 써서 여러 번 보면서 수정해야 하니, 스토리보드는 정말 많은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또한 작업을 하면서 아트디렉터와 작가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작품의 기본 설정이 변하기도 한다. 내 첫 작품 Spin a Scarf of Sunshine의 경우 본 작품의 주인공은 평범한 영국 소녀였는데, 그림 작가인 나의 출신을 고려해서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도 다문화 가정인 것을 고려하여 작품 곳곳에 다양한 한국적 소품들을 넣는 것이 참 재밌었는데, 그림 작가인 나의 고유한 문화를 인정해주고 과감하게 넣게 해 준 아트 디렉터의 결정과 안목에 깊은 인상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평범할 수 있었던 작품이 좀 더 문화적으로 다양해져,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이 다문화적인 시대에 의미가 있는 작업을 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스토리보드는 대개 2-3회 정도 수정이 되며, 한번 메일을 보내고 피드백을 받기까지 1-2주가량의 빈 시간이 생기게 된다. 그 쉬는 시간에 다른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시간을 의미 있게 채우는 방법을 아직도 많이 고민하고 있다.


스토리보드 작업. 대개 많은 수정을 거친다.



4. 스케치 작업



스토리 보드 작업이 끝나면 컬러링 작업이 들어가기 전 스케치 단계에 들어가는데, 최근에 대개 아이패드로 작업을 한다. 수정 작업은 역시 1-2번 정도 거치며, 스케치 작업은 대략 1달 내외로 짧게 걸리는 편이다. 아트 디렉터들은 스케치 작업을 통해서 전체적인 작품의 이미지를 확실히 할 수 있으므로 신경 써서 잘 그려주는 것이 좋다.


예전에는 스케치 작업을 하면서 색깔을 따로 넣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전체적인 페이지의 색감을 매니징 하기가 어려워서 따로 레이어를 얹어서 초벌 색칠까지 하는 편이다. 귀찮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컬러 작업을 하기 전에 페이지를 넘기면서 각 페이지마다의 색감 관리를 하기가 아무래도 편하고 초벌 색칠을 기반으로 그 위에 여러 덧칠을 하면서 완성을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연필 스케치만 있는 하얀 화면을 보면서 이걸 언제 다 칠하나- 하고 망연히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하기 시작한 이후로 작업 시간이 더 효율적으로 단축이 돼서 일이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각각의 단계를 부드럽게 이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지루하고 긴긴 작업을 하는데에 생기는 스트레스도 줄어들어서 매우 좋다.




5. 마지막 컬러링 작업과 수정




스케치 작업이 통과되면 대략 2-3개월 동안 표지를 포함한 본 색칠 작업에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본 작업의 가로, 세로 사이즈와 해상도를 검토하고 정확한 표준에 맞춰서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 (의외로 이런 실수 때문에 전체 작업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각 페이지의 위아래 가로 세로의 Margin은 어떤지 보고, 가능한 같은 파일을 여러 개 복사해서 그 위에 작업하여 정확한 포맷으로 통일성 있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스케줄 관리가 정말 중요하다! 남아있는 2-3개월의 시간 동안 한주에 몇 장을 그릴 수 있는지 계산하고 반드시 그 할당량을 매주 채워서 완성해나가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9-6 Job처럼 꾸준히 정해진 시간에 열심히 그리는 인내력이 필요하다.


나는 자연 풍경이 나오거나 서정적인 장면의 경우 수작업 그림을 스캐닝한 후에 편집해서 작업하곤 하는데, 아무리 Procreate의 훌륭한 브러시들로 작업을 해도 수작업의 직관성과 자연스러운 느낌을 재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 외 주요 인물들과 인공물 배경의 경우 아이패드로 작업 후에 컴퓨터로 옮겨서 디지털 작업과 후보정을 한다. 작업은 Corel Painter의 다양한 브러시를 활용해서 진행하는데, RGB 모드로 작업을 한 후에 마지막 단계에서 CMYK 모드로 바꿔서 색깔 보정을 한 후 마무리한다. 그렇게 틈틈이 한 작업들을 Dropbox 에 백업 겸 업로드를 해놓다 보면 어느새 긴 마라톤의 끝이 보이게 된다.


작업 후에 1-2번 정도의 수정기간을 거치는데, 그동안에 어떤 부분은 색깔이 바뀌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고 사이즈가 달라지기도 한다. 주로 인물 표정이나 머리카락 표현에서 수정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아무래도 독자가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이 주인공이니 만큼 주인공에 대한 요소들이 가장 크게 바뀐다. 하지만 대개 이전 스토리보드나 스케치 단계에서 크게 수정을 거쳤기 때문에, 표지 같은 아주 중요한 작업이 아닌 이상 본 작업에서 크게 바뀌는 건 거의 없는 편이다.


샘플 커버 이미지 중 하나. 본 작업물은 내년 2월 중에 나올 예정이다. 제목은 "Little Blue Bunny"


그림책이든 소설 표지이든 삽화 작업이든, 출판사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는 우리가 미처 만나지 못하는 많은 관련 부서들과 함께 하는 협업 프로젝트이다. 디자인 부서는 물론 출판사의 프레지던트가 참여하는 기획 부서, 마케팅 부서, 회계 부서 등등… 나와 일하는 아트디렉터는 이 모든 결정 사항들을 모아서 내게 전달을 해주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같이 얽혀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허투루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늘 많은 무게감을 갖고 일하지만, 동시에 출판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독자들을 위한 최선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된다.


출판사는 든든한 동료이자 작가로서 독자와의 문을 여는 하나의 통로라고 생각한다. 늘 미래의 독자들을 의식하고, 그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작품으로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작가로서 오래 일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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