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희망이 툭 끊어진 기분
우울감이 심했던 2주가 지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끔 혼자 몰래 울기도 했지만, 나름 할 일을 찾으며 그런 감정들을 잘 밀어냈다. 그때 나는 우울증 관련 에세이나 심리 관련 책들을 읽었다. 저자들의 북토 크도 찾아갔던 걸 보면 어렴풋이 내가 혹시 우울증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렇게 5개월이 지났다. 나는 어떻게든 내게 맞는 일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야 무기력함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OTT 서비스에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의 자막 제작업을 시작했다. 여러 테스트를 거쳐 한 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드라마를 맡았다. 나는 유명한 드라마는 거의 다 보았을 정도로 드라마광이다. 그래서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니!
그런데 역시 일이라는 건 상상과는 참 다르다. 나름대로 가이드라인을 꼼꼼히 보며 작업을 잘 해냈다고 생각했지만, 관리자님께서는 맞춤법이나 가이드라인에 맞지 않는 오류가 많으니 다시 검토해 달라고 하셨다. 처음이라서 내가 아직 미숙하다고,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3번을 검토한 끝에 파일을 다시 보내드렸는데 검수자 분께서 더 이상 작업이 어렵겠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사실상 일에서 잘린 거였다.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툭 끊어진 기분이었다. 동시에 너무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친구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괜찮다고 믿었다. "까짓 거 다른 업체들을 다시 찾아 다시 잘 해내면 되지."라고 짐짓 의연하게 생각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확신이 생기다
그러는 동안 없던 증상이 생겼다. 가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세게 뛰었다. 갑자기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센 심장 박동에 놀랄 정도였다. 처음 이 증상이 나타난 건 불면증으로 잠이 안 오는 날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잠깐 이러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또 어떤 날에는 뜬금없이 TV를 보다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처음에는 심각한 건가 싶었지만, 곧 이 증상에 익숙해지며 무뎌졌다.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 잠이 잘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 평생 이렇게 한심하게 살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냥 내가 죽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도 나에게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난 인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날은 그게 마치 정답인 것처럼 확신이 들었다. 휴대폰을 들어 처음으로 [아프지 않게 죽는 법]을 검색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피식 웃었다. 죽고 싶다면서 아프기는 싫은 나를 스스로 비웃는 것처럼.
인터넷에는 자살 방지 캠페인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나열된 게시물 중 하나를 클릭했다. 저마다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세상에 나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라고 생각하는 한편 죽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단단해졌다. 그러다가 어떤 분의 댓글을 봤다.
나의 얼었던 마음을 녹여준 말
"참 많이 애썼고, 수고했고, 고생했어 다들. 세상에 너희를 힘들게 하는 건 너무 많고 생각한 대로 되는 일은 없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많이 지치기도 할 거야. 힘내라고 말하지는 않을게. 힘든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해봤다 아무 소용없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괜찮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많이 벅차겠지만 너희가 가는 그 걸음들이 하나 둘 보며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분명 행복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항상 밝기만 하면 사막이 된다더라. 비가 오는 날도 있고 바람이 부는 날도 있어야 비옥한 땅이 된다고 하더라. 지금 이 힘듦과 불행도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너무 걱정하지 마. 지나가는 먹구름일 뿐이야. 곧 너희에게 좋은 일들이 찾아올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지금까지 묵묵히 버텨준 너희가 참 대견해. 참 많이 애썼고, 수고했고, 고생했어. 잊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항상 옆에서 응원할게."
여러 번 글을 읽으며 펑펑 울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꽁꽁 얼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살아내느라 애썼다는, 다 괜찮아질 거라는 어찌 보면 뻔한 그 말이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나를 살고 싶게 했다. 난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구보다 살고 싶었나 보다. 그저 열심히 사느라 고생했다고, 너의 인생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너는 지금 잘 살고 있다고 듣고 싶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