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의 계절을 지나며

쉼표, 그리고 며칠.

by 심온

며칠 전, 마지막 월급이 떨어진 통장에 실업급여가 입금되었다. 그 숫자들을 바라보니 안정감과 불안감이 묘하게 뒤섞였다.


이런 복잡한 감정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실업급여를 받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일 터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고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낯선 자괴감이 밀려온다. 마치 '급여'라는 단어 앞에 '실업'이라는 두 글자가 덧붙여진 것처럼, 내 삶도 어딘가 불완전해진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실업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보낸 세 달은 의외로 바빴다.


며칠을 술과 한숨으로 보낸 뒤, 매일 아침 9시에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업이라는 이름의 자유 속에서, 20페이지짜리 단편소설에는 키스라는 행위 뒤에 숨은 외로움을, 40페이지짜리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아를 찾아 헤매는 이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문예지 두 곳에 단편을 응모했다. 당선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글을 쓸 때마다 새로운 단어들이 피어나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여러 취미를 가진 다채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깊이 없는 '만능 입문자'로 남았다. 그래도 '등단'이라는 꿈을 꾸어본다. 이 허황된 꿈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글로써만 표현할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 사랑, 그리움, 미안함, 욕심처럼 말하기 어려운 마음들을. 나는 이런 감정들을 글로 담아내려 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힘든 하루를 견디는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상의 루틴을 찾고자 시작한 수영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수영장에서는 자유형, 배영, 평영을 익히고 이제는 접영 발차기라는 대담한 도전까지 시작했다. 서툰 팔 동작으로 물살을 가르려 애쓰는 우리를 보며 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만, 그것은 괜찮다. 초급반 동료들과 함께 엉성한 팔 젓기 요령을 나누고, 어설픈 동작에도 서로 격려의 엄지를 들어 올린다.


우리는 그저 웃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완벽한 영법이 아닌, 이 서툰 연대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잊고 있던 웃음이 물방울처럼 하나둘 피어오른다.


이제는 전화기 너머로 오가는 짧은 대화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한때 나를 붙들어 매던 두 알의 약은 책장 한구석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 때로는 멈추는 것도, 놓아주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퇴직하던 날, 나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이제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한다. 단순히 잘해왔던 일이 아닌,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일을 쉽게 말하지 못한다. 과연 언제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직업을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의아해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못마땅해할 것이다.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특별한 위로가 된다. 한 달을 함께 보내며 들었던 "유쾌하다"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유쾌한 사람, 즐거운 사람, 따뜻한 사람—이 말들이 다시 나를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간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서로에게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고, 따뜻한 칭찬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섬세히 배려한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읽을 줄 안다. 그래서 더욱 말을 아낀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얼굴들은 메마른 미소, 깊어진 주름, 흐려진 눈빛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우리의 표정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가는 것이 보인다.


웃음이란 참 묘한 것이다. 혼자서도 지을 수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노트북 앞에서 혼자 글을 쓰며 웃고 울던 시간들이 이제는 조금씩 멀어져 간다. 대신 나는 사람들 사이로, 세상 속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래, 굳이 외로움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때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물결처럼 살아도 좋을 테니.

이전 15화불청객이라 쓰고 친구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