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으며
맺으며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여라.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이랑 절대로 내지 말아라.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 버리게 하지 말아라.’
[음식디미방]이라는 한글 조리서의 말미에 붙은 글이야. 이 책은 17세기 중엽 경북 안동과 영양 일대에서 살았던 정부인 안동 장 씨가 말년에 쓴 조리서야.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엿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지. 더구나 이 책은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 때문에 조선 중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어.
이 책에는 146개 음식의 조리법이 실려 있어. 면 요리부터 시작해서 술 담그는 법, 식초 담그는 법까지 아마도 양반집의 큰 살림을 하는 데 필요한 조리법은 모두 다 모아 놓은 것 같아.
이렇게 많은 레시피를 전달하면서 장 씨 부인은 한 마디 잔소리도 섞지 않고 아주 담백하게 꼭 필요한 재료, 조리 방법, 주의 사항 등만 적고 있어. 잔소리라고는 책 말미에 붙여 놓은 이 몇 줄 뿐이야
엄마는 장 씨 부인의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음이 나와. [음식디미방]의 해설서에서 저자는 이 글을 딸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딸들은 들러리일 뿐이야. 호명하지는 않았지만 집안 살림을 이어받을 며느리들에게 당부하는 말이지.
며느리들에게 대놓고 잔소리도 못 하는 기품 있는 노부인의 노심초사가 그대로 읽히지 않니? 딸들은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이랑 절대로 내지 말라는 대목도 재미있지. 만만한 딸들한테 으름장을 놓아 혹시라도 원본이 집안을 벗어나는 걸 미연에 막으면서 동시에 며느리들한테는 그만큼 경각심을 갖고 소중히 다루라는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잖아.
엄마는 장 씨 부인처럼 잔소리를 절제하지 못해 무려 14편의 잔소리 편지, 거기에 서문까지 15편을 쓰고도 다시 에필로그까지 쓰고 있네. 너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물려줄 변변한 레시피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레시피를 핑계 삼아 아들에게 잔소리가 하고 싶었던 게 엄마 본심이야.
아들, 자식을 많이 두던 시절에는 그중 형편이 어려운 자식을 아픈 손가락이라고 표현했어. 자식이 한 둘 뿐인 지금의 부모한테도 그건 마찬가지야. 엄마가 병원에서 병을 진단을 받고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우리 아들이야. 그때 아직 미성년자였던 동생도 눈에 밟히지만 아픈 네가 더 앞에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더라.
네가 아프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어. 어떤 이는 질병을 친구로 여기라 하고 어떤 이는 손님으로 대하라 하는데, 친구라면 아주 까탈스러운 친구고 손님이라면 어지간히 난폭한 손님이지. 질병에 갇힌 몸과 가로막힌 삶은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너에게 너무도 가혹한 운명으로 느껴졌을 거야.
내가 네 보호자로 병원에 다니는 대신 네가 내 보호자로 병원을 드나든 지 벌써 만 3년이 넘었어. 너는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어 버렸지. 마치 그동안 어른 되기를 스스로 유보해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말이야.
이제 엄마한테는 아픈 손가락이 없어졌고, 지병을 다스리며 어엿한 성인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듬직한 보호자가 생겼어. 그동안 네가 얼마나 길고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을 지나왔는지 엄마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네 모습이 더욱 대견하고 고마워.
이제 너의 병과 너의 몸에 조금 익숙해졌겠지만, 앞으로도 자주 육체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할 거고 환자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을 거야. 아픈 몸으로 살아가기도 힘들지만 함께 살아가기는 더 힘든 거니까.
어떤 이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질병을 딛고 한계를 넘어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도 하지. 마음씨 고운 이들은 젊은 환자를 동정하고, 어설픈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은 유전이다 생활 습관이 잘못됐다 등 난치 질병의 원인을 환자에게서 찾으려고 들고, 주책맞은 수다쟁이들은 그만하길 다행이라고도 할 거야. 냉정한 이들은 환자는 열외자라고 생각하고, 그악스러운 자들은 낙오자, 심지어 부양해야 할 짐 덩어리라고 혐오하기도 하겠지. 젊은 희귀병 환자를 징집을 피하기 위한 꾀병 환자가 아닌가 색안경 끼고 쳐다보는 사람도 없지 않을 거고.
이제 직장인이 되었으니 이 모든 편견과 쓸데없는 참견 속에서도 너는 그들 모두와 어울려 살아야 해. 그러니까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거야. 어쩌면 질병을 다스리는 것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몰라.
그래서 엄마는 너한테 무언가 더 많은 얘기를 해주고 싶었나 봐.
다정하고 속 깊은 우리 아들,
먼 훗날 어느 궂은날 해 질 녘에 엄마 잔소리가 어쩌면 그리울지도 모르니까……
특별할 것은 없지만 엄마는 이제 약속한 일곱 개의 레시피를 모두 전했어. 처음 이 글을 계획할 때 열 개쯤 채울까 생각해 봤었는데, 여덟 번째 레시피부터는 엄마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채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궁금하다. 네가 사랑하는, 미래의 네 가족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아들, 할머니가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아직도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일일이 챙기시는 것처럼 너도 그렇게 식구들을 살뜰히 챙기면서 다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어디에 있든, 누가와 있든, 혹은 혼자 있든, 무엇을 먹든 너의 모든 밥상을 엄마가 축복할게.
*인용문『 음식디미방 주해』 백두현 저 / 글누림 / 2006년 초판 p.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