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대만, 예류의 핑크언니들

난리난리 대만여행(3) 비바람 부는 예류에서 시작된 하루, 예스진지 투어

by 이설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9시에 일정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8시쯤 서둘러 조식을 먹으러 갔다.

오차드 파크 조식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순간 옛날 예식장 느낌이 스쳤다.

샹들리에 같은 조명과 흰색 의자 커버가 주는 묘한 분위기랄까.

그래도 음식은 깔끔했고, 간단히 아침을 때우기엔 괜찮았다.




이날은 드디어 지우펀을 가는 날이었다.

이번 여행의 메인이라 할 만한 일정.

우리끼리는 꽤 원대한 계획을 세웠는데, 여행이라는 게 늘 그렇듯 생각대로만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매력 있는 게 여행이려나?


3박 4일 중 하루는 자유여행이었고,

나머지 3일은 계속 가이드와 함께였는데, 매일 다른 가이드가 우리를 맡았다.

나름 신선하다고 해야 할까?

뭔가 우리만의 여행을 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패키지지만, 자유여행의 기분이랄까.






지우펀을 가는 길의 하루 투어 일정은

버스 투어 여행객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이날 투어의 이름은 ‘예스진지’.

처음엔 이게 뭘까? 하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우리가 가는 네 곳의 앞글자를 딴 이름인 걸 알게 되었을 때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단순 명료하면서도 센스 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이날 버스투어의 가이드는 여성분이었는데 첫인상은

조금 차가워 보였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시니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버스 안에서 대만의 역사와 문화, 음식 이야기까지

맛깔나는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었다.

거기에 독특한 말투까지.

나중엔 그 말투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날 가이드분 왈,

“스펀이나 지우펀은 비가 올 수 있으니

비가 온다면 예류에서 우비를 꼭 사세요.”

하고 말을 해주었지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타이베이의 하늘은 아직 맑았기 때문.

여행자 특유의 근거 없는 자신감,

‘설마 오겠어? 날씨요정의 힘을 믿어보겠어!’ 하며

옷까지 신경 써서 꾸몄다.

지우펀을 가는데, 좀 꾸며 봐야지!


그런데 맑았던 날씨는

예류로 가는 동안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기미였다.

12월의 대만은 원래 비가 잦다고 한다.

일기예보에서

맑다고 하면 50% 확률로 비가 오고,

비가 온다고 하면 100% 확실하다고.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래도 오늘은 괜찮겠지?” 하며 긍정회로를 돌렸다.

하지만 예류에 도착하기도 전에 빗방울이 굵어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는 것을 느꼈다.


결국 우리는 예류에 내려 바로 우비를 샀다.

알록달록한 우비들은 꽤 질이 좋다.

이 화려한 우비는 우리를 힘들게도 했지만,

나중에 사진을 다시 보니 그 우비마저도

추억의 한 장면이 되어 있었다.

다 같이 우비를 뒤집어쓴 모습은 누가 봐도 패션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기에 또 재미있는 기억으로 오랫동안 각인되었다.




예류는 바닷가 절벽에 기묘하게 깎인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단연 ‘여왕 바위’.

가느다란 목 위에 머리를 치켜든 듯한 모습인데,

바닷 바람에 툭 부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그런데도 보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왕 바위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서 있었고,

안전요원들은 관광객이 아니라 오히려 바위만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만지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예류의 풍경은 그 자체로 장쾌했다.

보호대도, 가림막도 없고 다만 빨간 줄이

그어져 있을 뿐.

그 덕분에 시야가 막힘없이 트여

바다와 바위가 그대로 다가왔다.

비와 바람이 심했는데도,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풍경은 웅장했다.


공주머리


맑은 날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비 오는 예류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핑크색 우비를 나란히 입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그 덕분에 ‘핑크 언니들’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예쁘게 사진을 남기기?

그런 거, 불가능했어요...

하지만, 덕분에 더 자연스럽고 생생한 추억이 남았다.


자유 시간 동안 가이드는 사진 찍을 시간을 넉넉히 주었지만 인기 있는 바위들 앞에는 줄이 길었고,

여왕 바위를 보려면 저 멀리까지 걸어가야 했다.

시간은 늘 그렇듯 넉넉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이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늦으면 버리고 갑니다.”

귓가에 울리는 그 말에 버림받지 않으려 열심히도

뛰어다녔다.




예류는 도시에서만 보던 답답함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마음속 깊이선

늘 자연을 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익숙한 건물과 번화한 거리 대신,

바람과 바다 앞에 서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연은 늘 변하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두렵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겸허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날 바다 앞에서

나는 마음속 돌멩이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게 바다는 늘 그런 곳이다. 무거운 마음을 살짝 덜어두고오는 곳.

그래서 다시 돌아가도 괜찮겠다 싶은 용기를 주는 곳.

그 무거운 하나를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예류를 나오는 시간,

비를 맞는 그 순간마저 행복이 스며들었다.


핑크언니들의 추억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