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리난리 대만여행(14) 배추와 군인 사이, 대만의 역사를 함께 하다
대만 여행의 마지막 날을 비가 흩날렸다.
그동안 타이베이에서는 보지 못했던 비를 마지막 날 만나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 소리 없이 내리는 비처럼 여행의 끝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타이베이의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비가 쏟아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마음은 이미 시먼딩 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엔 꼭 그곳에 들러야 해!
아쉬움을 남길 수는 없잖아?!
그래서 마음 한편에선 ‘오전 일정은 빨리 끝났으면’ 하는 조바심이 자리했다.
그렇게 시작한 마지막 날, 그날의 패키지는 정말로 온전히 네 명만 남았다.
가이드 한 명과 함께.
대만여행은 정말 패키지로 왔지만, 자유여행의 느낌이 강했다.
적재적소 교통편이 편하게 마련된, 필요한 곳에 설명이 곁들여진 그런 여행이랄까.
우리 끼리니 마음도 한결 가볍다.
거기에 매번 다른 가이드를 만나니 그것 또한 새롭다.
첫 목적지는 국립고궁박물관이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대만의 도시풍경을 보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풍경이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그런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에도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대하여.
세계 4대 박물관중 하나이며 장제스가 세 척의 배에 보물을 싣고 건너왔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살짝 그 흥미가 동하는 사이 차창밖으로 박물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물관 안은 생각보다도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한 번에 다 전시가 되지 않아 어떤 시기마다 전시들이 바뀐다고 하는데, 그걸 다 보는데도 그 규모만큼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정말 감탄이 나왔다.
층층이 끝도 없는 유물을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보고 설명을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유리장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화려한 과거의 유물들은 그 자태가 영롱했다.
처음엔 ‘짧게 보고 나가야지’ 했는데, 어느새 유리 앞에서 발이 멈추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작은 도자기 하나에도 믿기 힘든 정교함이 있었다.
꽃잎의 결, 모자 장식의 굴곡, 새겨진 문양 하나하나가 어쩐지 사람의 욕망처럼 느껴졌다.
청나라 귀족들이 유니크함에 집착했다는 말이 이해됐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물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완벽한 하나의 물건에 대한 의지가 눈에 그려졌다.
한정판을 원하는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함께 슬며시 올라오면서.
가장 인기가 많은 유물은 역시 옥배추였다.
이름만 들으면 평범한 채소지만, 그 안에는 시집가는 딸을 향한 축복의 의미가 담겨 있다 했다.
우리에게는 김치 재료지만, 그들에게는 순수와 번영의 상징이었다.
같은 배추인데, 나라가 다르면 이렇게 의미가 달라진다니.
도대체 배추가 왜? 했던 나의 의문은 이 이야기에서 한 번 그리고 그 배추의 단아한 정교함에서 또 한 번 사라졌다.
박물관을 나서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가게에는 배추과자가 있었다.
다른 기념품들을 둘러볼 정신은 없었지만, 요건 또 찰떡같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진정한 먹기행이라 할 수 있다. 암요.
우린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하나 샀다.
모양은 정교했지만 맛은… 음.
바 X나 킥과 콘 X즈 시리즈사이쯤의 맛이랄까.
그래도 호기심은 해결.
다음 목적지는 중정기념관이었다.
도착하자 웅장한 대리석 건물이 비 속에서 묵직하게 서 있었다.
거대한 문을 지나 가는데, 정문이 아니란다.
이게 정문이 아니면 정문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가이드는 이곳에 후문이 없다고 했다.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서죠.”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설명이 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기념관 안에는 중정기념관 전체를 축소해 만든 모형이 있었다.
세밀하게 만들어진 미니어처 속에 웅장한 현실이 압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전시실은 생략하고 바로 정문 쪽으로 향했다.
매시 정각에 열린다는 교대식을 보기 위해서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이드 말로는 비가 많이 오면 행사를 취소한다는데, 오늘은 다행히 진행된다고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린 맨 앞에 자리 잡고 교대식을 보기 시작했다.
드디어 교대식이 시작됐다.
총 여섯 명의 군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총을 들고, 발을 맞추고, 동시에 방향을 전환했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규칙적인 리듬이 마치 바닥을 통해 울리는 기분이었다.
엄청 느린 동작들이 절도 있게 서로의 박자에 딱 맞춰져서 이루어지는 이 교대식이 나는 살짝 무섭기도 했다.
눈앞에 총칼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비록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긴장감을 주었달까.
그런데 그때 가이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군인들은 얼굴 키를 다 봐요. 무척 중요하게요. 거기에 머리사이즈까지 봅니다. 헬멧 사이즈가 하나뿐이거든요.”
그 말을 듣고 다들 웃음이 빼져 나왔다.
왜 인지는 상상에 맡겨보렵니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천천히 흩어졌다.
비는 여전히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우리는 기념관 앞에서 몇 장의 사진을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점심은 대강 먹고, 시먼딩을 다녀와야 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
대만의 가이드들은 끝까지 책임을 진다고 했다.
짐을 부치고, 체크인하고, 탑승 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이제 가셔도 돼요.” 몇 번을 말했지만, 가이드는 단호했다.
“아직 아니에요. 짐이 부쳐지는 걸 직접 봐야 합니다.”
결국, 수하물이 벨트 위로 사라지고 나서야 가이드의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점점 사라져 가는 대만을 보며 뭔가 가득 채워가는 기분이 들었다.
짧았지만 묘하게 오래 남을 여행.
여행의 끝이 아쉬움일 때도, 피곤함일 때도 있다면
대만은 만족감이었다.
뭔가 가득 찬 일정을 보냈다는 뿌듯함, 우리끼리 보낸 시간들의 행복함
그리고 매 순간 두둑했던 뱃속이 주는 따뜻함까지.
힘들었던 시간마저도 그 속에 녹아버렸다.
그렇게 비 내리는 마지막 날, 그렇게 여러 감정 속에 대만 여행에 안녕을 고했다.
안녕, 우리의 시간.
우리의 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