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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Jul 11. 2022

시월드 플렉스

- 시 숙모, 존경하는 작은어머니

   고물가에 금리까지 인상된다는 뉴스가 연일연야 들려온다. 장마와 폭염 때문에 상추값이 한 상자에 12만 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럴 때는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둔 묵은 김치가 한몫한다. 김치를 반찬으로 먹기도 하지만 ‘돼지고기 묵은지 찜’을 하든지 ‘묵은지 비빔국수’ 등으로 여름 나기를 하면 그만일 듯했다. 김치를 담은 큰 통 하나를 열어 듬성듬성 썰어서 작은 통에 옮겨 담았다. 그렇게 해두면 마음이 내킬 때 뭐든지 해서 한 끼를 때울 수 있다. 김치를 옮겨 담을 때면, 남편은 입안의 혀처럼 옆에서 통을 챙겨다 놓아주고 뚜껑을 닫아주곤 한다. 김치를 만질 때는 손에 고춧물이 묻어서 남편이 으레 그렇게 해왔었다. 마지막으로 썰은 김치가 어중간하여 작은 통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주방을 지켜온 플라스틱 통]

 “요것은 조금만 남았으니 저 통을 주세요, 작은어머님이 주신 통이에요.” 나는 발로 통을 가리켰다.

“그래? 난 몰랐네.” 남편은 그 김치통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셋째 서방님이 허리 수술했을 때 물김치를 담가서 오신 것이에요.”    

 

  벌써 30년 정도 된 일이다. 셋째 시동생이 우리 집에서 함께 살 때였다. 허리가 아프다며 디스크 수술을 했었다. 그때 작은어머니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분이 열 일을 제치고 물고추 갈아 넣어서 김치를 담가서 병원으로 오셨다. 병원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라며 챙겨 오신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허접하게 된 그 플라스틱 통을 내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통을 볼 때마다 작은어머니의 숨겨진 사랑이 느껴졌다. 그 많은 시댁 조카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마음을 다 하여 거두시는 사랑은 두고두고 감동이었다.


   작은 어머님은 평생 빠듯하게 사셨다. 전남 영암의 시댁 식구들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상경하면, 그 작은어머니 댁으로 들어가곤 했다. 작은어머니 댁은 서울에서도 비탈지고 높은 곳이었고 주택가 끄트머리의 셋방살이였다. 그래도 시댁 식구들이 그곳으로 들리곤 했던 것은 아마도 피붙이들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시던 작은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남편은 작은어머니에게 시댁 장조카다. 작은어머니는 시간을 내어 우리의 신접살이 집을 얻어주셨다. 그해 김장김치를 앙증맞은 장독에다 담아서 가지고 오셨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사랑인지 제대로 모르고 지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을 흉내도 낼 수 없는 걸 보면 무심하게 보낸 시간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사진:픽사 베이]

  내가 지방에 살았을 때, 몇 번 작은어머니 댁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그럴 때면 작은어머니는 가계부에 꽂아둔 만 원짜리를 꺼내어 여비로 챙겨주곤 하셨다. 그것은 작은어머니에게는 찬거리를 살 돈이거나 공과금을 낼 것이었을 텐데 피 같은 돈을 질부에게 챙겨주신 것이다.   

  

 내가 뒤늦게 교사로 발령받아서 나가던 날, 작은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니 입던 옷 입지 말고 옷 한 벌 사 입어.”하시며 30만 원을 보내주셨다. 그 정도는 그 당시의 작은어머니께는 한 달 생활비 정도였을 것이다. 작은어머니의 마음을 받으려는 심정으로 백화점에 가서 옷 한 벌을 샀다. 그랬더니 점원이 응모권을 내밀었다. 재미 삼아 응모를 했다. 보물찾기 한 번 찾아본 적 없는 나였는데 작은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돈의 위력 때문이었을까? 응모권이 2등으로 당첨되어 옷값보다 더 비싼 제주도 옥돔을 받은 적이 있다.     


  작은어머니는 아들 하나만 달랑 두셨지만, 우리 시댁은 7남매이고 다른 작은 시댁들도 자녀들이 많아서 작은어머니는 평생 그 대소사에 다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평성?을 따져보면 작은어머니는 손해 보는 구조였다. 쉴 새 없이 우리 시댁과 작은 시댁에 대소사가 생기는데 작은어머니는 축하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던 날, 우리는 맘먹고 축의금을 드렸다. 그게 도리일 것 같았다.     


 반전은? 작은아버지는 우리 시아버지와는 배다른 형제다. 그런데도 작은어머니의 무한한 헌신으로 우리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작은어머니의 팬이다. 세 명의 동서들도 작은어머니라 하면 무척 좋아하며 존경한다. 작은 어머니는 노랑 장미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은은한 향으로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정을 주신다.

작은어머니의 근검절약과 이웃을 돌아보는 삶이 축복이 되어 지금은 서울에서 아파트를 지니고 잘 살고 계신다. 이제 후로작은어머님의 가는 길이 만사형통하며 여생을 잘 보내시기 빌어 본다.


작은어머니, 너무 감사합니다!

                   여생에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 p.s.


  글이 발행된 이후에 남편이 투덜댔다. 작은 어머님이 베푸신 사랑을 너무 조금만 표현했다나?


  "작은어머님이 며느리 볼 때 우리가 축의금 했던 것보다 더 보태어 다시 우리 딸 결혼 때 돌려주셨잖아?"

  "아하, 그것까지는 생각 못했네요."

  "그리고 우리 아들이 재활 병동에 있을 때, 휠체어 등받이가 화학제품이라서 해롭다고 밤새워 미싱질 하여 휠체어 등받이 싸개를 만들어 오신 것도 안 썼고? 명절마다 병문안 오셔서 간호사실과 병실에 떡 돌린 것도 빠뜨렸던데?"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작은 어머님의 사랑을 아무래도 덜 묘사한 것 같아서 죄송했다.

  "어차피 기억을 다 할 수는 없으니 빠뜨린 게 많을 것 같네요."라고 말을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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