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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Jan 07. 2023

사운드 오브 "따르릉~"

- 아버지의 자전거 벨 소리

학년 말 자투리 시간, '스크린 영어' 동아리 활동 때 습관처럼 챙겨보는 영화가 있다. 볼 때마다 재미있고 명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는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영화를 보다가 머릿속이 굳어지는 느낌이 들곤 하는 순간이 있다. '본트랩' 대령이 호각을 불면 일곱 명의 자녀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 나와서 일렬횡대로 줄을 서는 모습이다. 그 장면을 볼라치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회오리처럼 떠 올랐다. 본트랩 대령이 그의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가 나의 아버지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군대식이다. 아이들은 가정에서도 제복을 입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라는 가정교사를 만난 이후에야 긴장을 풀고 웃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특히 본트랩은 묻어두고 지냈던 자신의 재능, 노래하는 것을 되찾게 된다. 그가 부르는 '에델바이스'라는 노래는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는 장터에서 술이 떡이 되도록 취했을지라도 우리 집을 잘 찾아 돌아오곤 했으니 한편으로는 모범 술꾼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만취되더라도 고함을 지른다거나 다른 사람과 다투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주사도 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냥 곤드레만드레 잠에 곯아떨어질 뿐이었다.

숙취 후에 잠을 자는 것은 몸에는 좋지 않다는 말이 항간에 떠돈다. 그런데 아버지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질 판인데 어머니가 폭풍 잔소리로 싸움을 걸곤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술에 만취한 후에 곧바로 잠들 수 없도록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였다. 부부싸움 때문에 술꾼 아버지 건강에 서푼어치 도움이 되었을 것도 같다.


아버지는 해 질 녘이 되면 마을 앞 신작로에서 자전거 벨 소리를 몇 번 울리셨다. 따르릉거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면 우리들은 일단 차렷자세 준비부터 했다. 저마다의 일을 일단 멈췄다. 아버지가 마을 어귀로 접어드는 길에서 또 한 번 자전거 벨 소리로 신호하셨다.


'얘들아, 아버지가 퇴근한다.' 


아버지는 아마도 자신의 퇴근을 알리는 것이 도리라고 여기셨을 것 같다. 대문 앞에 멈춘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셨다. 만취 상태였지만 대문 안으로 자전거를 잘 끌고 들어오셨다. 그 순간 우리들은 마루에 일렬횡대로 섰다. 연령 순으로 서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정해진 자리가 있었다.


"아부지 댕겨오셨습니꺼?"


우리는 한 목소리로 떼창 하듯 아버지께 인사를 했었다. 그 시간 이후부터 우리는 얘기도 하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마치 감옥 속의 죄수들처럼 눈치 보며 각자의 일을 했었다. 


본트랩 대령은 '에델바이스'를 멋들어지게 잘 불렀다. 굳이 그 대령과 비교하자면 나의 아버지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셨다.

[에델바이스를 부르고 있는 본트랩]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필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부기 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부기~

                                                   [아버지의 애창곡]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은 본트랩과 비슷한 점이 있긴 했지만 노래 실력은 꽝이었던 것 같다. 본트랩의 감미로운 노래 실력과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 대신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나의 오빠는 아버지와는 사뭇 달랐다. 본 트랩 대령을 무색게 할 정도로 오빠는 기타를 잘 친다.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다. 본트랩 대령이 가족 합창단을 이끌었다면 나의 오빠는 밴드 지휘자이며 보컬도 담당한다.  오빠는 밴드 공연 봉사를 다닌다. 오빠가 기타를 치며 '에델바이스'를 부르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영화 속에 있는 것인지 영화가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본 트랩 대령 모습이 슬쩍 풍기는 오빠를 만날 때마다 그 영화가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내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는 왜 아버지께 절대복종했을까?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주 다투었고 가정에 충실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그 권위는 어디에서부터 나왔던 것일까? 우리는 아버지께 "예"라는 대답 외에 다른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와 눈을 맞춰본 적도 없다.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을 말해본 적도 없다. 아버지는 그냥 산이었다. 감히 마주 할 수 없는 큰 산이었다.


아버지가 논에 가서 모내기를 하라 하면 이유 불문하고 어린 우리는 애들끼리 모내기를 했었다. 한 번은 모내기가 다 끝나기 전에 어두워져서 집으로 왔었다. 초저녁에 잠이 드셨던 아버지는 새벽 2시에 우리를 깨웠다.


"어제 하다만 모내기 마저 끝마쳐라."


아버지의 비상 기상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는 군인들처럼 완전 군장을 하듯이 모내기 차림을 했다. 컴컴한 마을길을 지나서 졸면서 논으로 향했다. 모내기를 기어이 마쳤다. 때로 달빛을 등불 삼아 모심기를 했지만 심기운 모가 줄이 비뚤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우리 논둑 옆을 지나는 윗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었다.


"신기하네. 어제저녁에 반 밖에 안 했던 모심기가 밤새 다 되어 있네."

"그러게. 이거 밤새 우렁각시가 와서 모내기를 끝냈나?."

"저 집은 낮에는 돈을 벌고 남들이 자는 밤에도 일을 하네."

"하여간 별난 집안이야."


또한 아버지는 우리가 농사일을 하는 것이 학교에 가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여기셨다.


"오늘 타작해야 하니 학교 가지 마라."


아버지의 그 한 마디면 우리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선생님한테 혼나요."라고 말을 하면,

"선생이 밥 맥여 주나? 우리는 학교보다 농사가 더 중요한 집이야. 가정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야."라고 혼을 내곤 하셨다.


선생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는 학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른 집안은 선생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던 시절이었는데... 푹푹 찌는 여름날의 뙤약볕에서 보리타작을 하던 괴로움은 생지옥과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가려워지고 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다. 우리는 부지런히 보릿단을 탈곡기 옆으로 가져다 나르고 탈곡된 곡식을 집으로 실어 날랐다. 보리타작을 끝낸 그다음 날 학교에 가면 수업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너거들은 대학까지 다 가고 높은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야. 농사 짓고 살믄 평생 이 고생을 못 면하는 것이야."


어머니는 자식을 농사 일로 고생시키는 삶을 살게 하지 않으려고 결심한 분이었다.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어 어찌하든지 펜대 잡고 사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뜻을 따르자니 아버지에게는 일상이 버겁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 일상에서 도망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아버지는 술에 취해버리는 것을 택했던 것 같다.



보리타작은 더운 것이 문제였다면 가을에 했던 벼 타작은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인근에 타작하는 콤바인 개수가 한정적이라 우리 집 타작 순서는 늘 밤에 예약되곤 했었다. 밤을 꼴딱 새우면서 타작을 했었다. 춥고 힘들었다. 타작이 끝나갈 무렵이면 짚단을 쌓고 그 속에 잠시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세상에 그렇게 안온한 곳은 다시없었다. 잠에 곯아떨어져서 학교에 무단결석을 한 적도 있었다.


농사일을 돕는 것이 싫고 지겨웠다. 군대처럼 자유가 없고 감옥 속 같았던 나의 집이 싫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마음이 많이 상했던 일이 또 있었다.

남들은 어렵다고들 하는 공부가 내게는 제일 쉬웠다. 공부는 정신만 좀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공부하는 것은 밤새워 타작을 하거나 부모님의 다툼을 지켜보며 우는 일에 비하면 참 쉬운 일이었다. 우등생이 되고 보니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친구도 많이 생겼다. 나의 자존감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림 대회를 나가거나 글짓기 백일장에 출전하기도 했다. 한 번은 학교 대표로 군 대회 백일장에 나갔는데 거기서 장원을 했었다. 학교에서는 축하할 일이라며 선생님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서 스스로 자랑스러운 맘으로 상장과 부상을 들고 집으로 갔었다.


"너거 엄마 집 나갔다. 너거 아버지한테 퍼붓다가 한 대 맞고 이제 더는 안 산다며 보따리 싸서 나갔다. 여자가 엔간히 해야 남편한테 안 맞지. 비단결같이 심성고운 너거 아부지가 마누라 한테 손찌검을 할 때는 알아봐야지."


동구 밖에 나와 있던 할머니는 아버지 편을 들며 말씀하셨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상장과 부상을 옆에다 버려두고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울었다. 내가 대단한 상을 받아왔지만 우리 가정에서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나의 기쁨은 물거품이 되었고 나에게  칭찬 한마디 해주지 않은 가정에 대하여 정나미가 있는 대로 떨어졌다.


어머니는 왜 자식을 낳아서 이렇게 울게만 하는지? 그때처럼 어머니가 미운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담을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다 싫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알코올 중독으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이 좋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참 애석하다. 가정사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그 아버지와 마음을 끝끝내 맞추지 못하고 한평생 다투며 부부의 연을 이어간 어머니도 짠하다. 그 삐거덕대던 부부 밑에서 나의 맘은 곪을 대로 곪아 버렸다. 가족들에게 마음을 닫아 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분들과의 얽혀 왔던 갈등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분들이 아픈 시간을 힘들게 겪어냈을 것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마음이 아프다. 이미 40년 전에 진토가 되어버린 아버지께 늦었지만 손을 내밀고 싶다. 너무 늦게 이해해서 죄송하다고. 


요양원에서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는 어머니도 요즘은 울컥울컥 보고 싶다. 뇌연화가 와서 정신이 가물거리는 어머니는 자녀들의 전화번호만은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울려대는 어머니의 전화 때문에 어머니 연락처를 수신 거절 리스트에 올리고 살고 있다. 가는귀가 어두워서 통화가 불가능한 상태다. 그래도 어머니께 연락을 해보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따뜻하게 어머니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 


이 매거진을 기획한 것도 부모님을 향한 내 마음을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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