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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Jan 10. 2023

웃.음.꽃.이 피지  못했습니다

- 웃음이 많아서 힘들었던 날들~

아들이 10년 전에 자전거 사고로 중증환자가 된 이후로 우리 부부는 시댁 모임에 가지 못했다. 아들을 품고 살아야 하는 나날들이라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 시절이라 거의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특히 명절에는 우리 부부가 아들을 돌봐야만 하는 독박 간병을 하게 된다. 간병인이나 활동보호사들이 명절을 쇠러 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위드 코로나가 되었으니 얼굴 한 번 보자며 셋째 시동생이 가족 단톡방에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우리만 빼고 나머지 형제들은 휴가 때나 명절 때 나름대로 서로 만나보며 지내고 있었다. 형제들의 애틋한 배려를 생각해서라도 이번에는 시간을 좀 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시댁 식구들은 함께 모이기를 좋아했다. 그분들은 모이기 한 달 전부터 싱글거리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신혼 때 시댁에 가면 온종일 웃느라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곤 했었다. 그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개그맨이었다. 한 마디씩 툭툭 던지면 그냥 날 것의 개그 멘트였다. 원래 웃음이 많았던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명절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주일 넘도록 뱃가죽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아야, 아야 소리가 나오곤 했다. 몹시 많이 웃고 나면 한동안 뱃가죽이 아픈 것인 줄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웃음을 참으며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웃고 난 후에 뱃가죽이 당겨서 아픈 것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것도 고통이었다.


나는 원래 웃음이 많았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사소한 일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낙엽이 굴러가는 걸 본다면 당연히 웃을 사람이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은 웃을 일이지 않은가?


옆집 아저씨 손에 이끌려 입학식을 참석했던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처음부터 신이 났다. 일단 동생을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짬이 생겼다. 학교에는 이 마을 저 마을에서 몰려온 아이들이 참 많았다. 신기했다.


앞으로 나란히~

바로~

열중쉬어~

주목~

 

선생님의 한마디에 아이들이 줄을 맞추어 서고 선생님께 집중했다.  학교 생활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학교 놀이'를 했다. 깨진 사금파리로 하던 소꿉놀이보다 재미있었다. 나는 늘 선생님 역할을 했었다. 친구들은 당연히 내가 선생님이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도 내 자리를 엿보지 않았다. 학교놀이를 하던 버드나무 아래서 나는 웃음이 많아졌다.


정말 똑같데이.

니 다음에 크면 선생님 돼라.

맞다, 니 딱 선생님이다.


애들은 내가 선생 역할을 하면 너무 재미있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러면 나는 더욱 선생처럼 연기를 했고 날마다 연기가 업그레이드되곤 했었다. 우리는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도 했다. 놀이를 할 때마다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순이 편 할 거다.

안된다. 순이는 혼자 해도 우리 모두 다 이겨 뿌린다.


나는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또래들 보다 뛰어나게 잘했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에도 나를 따를 자가 없었다. 문제는 그런 내가 오랫동안 친구들과 그 놀이를 하며 놀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창 놀이가 재미날 즈음이면 집으로 불려 가기 일쑤였다. 


밥 해라! 

동생 봐라!

밭에 가라! 

논에 가라!


해가 지도록 맘껏 노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일을 시키지 않는 집이 참 좋아 보였다. 내 유년 시절에 신나게 놀지 못한 것은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지금도 나는 아무 할 일없이 빈둥빈둥 노는 일이 익숙지 않다. 그리고 신나고 재미있게 노는 일이 내게는 어색하다. 


나는 공부를 잘했고 옷을 단정하게 입었다. 그것은 시골 남자 중학생들에게는 좋게 보이는 점이었나 보다. 너나 할 것 없이 나에게 러브레터를 보내왔다. 그 시절에는 누군가에게 예쁜 편지지에 편지를 쓰고 또 답장을 받는 사랑놀음이 유행이었다. 아마도 한 두 명 빼고는 대부분의 남자애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던 것 같다. 특히 A는 초록색 잉크로 매일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펜으로 글을 쓰곤 하던 때였다. 글씨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악필이었으나 내용은 상당히 유식했었다. 아마 형들한테 한 수 배운 듯했다. A는 거의 몇 년 동안이나 편지를 보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초록색 글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자신들이 받은 편지 얘기를 주고받으며 깔깔대고 웃곤 했었다. 


중학교는 다른 두 군데의 초등학교에서도  진학해 왔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서로 익히 알았던 친구들과는 또 다른 애들과 사귈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노는 판이 달랐다. 웃음은 더 많아졌다. 별 일이 아니어도 우리는 온종일 깔깔대며 웃었다. 특히 내게는 웃음 바이러스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한마디 하면 모두가 웃었고 애들이 웃으면 나도 웃었다.

월곡 초등학교 출신 애들은 특이했다. 밤마다 몰려다니며 다른 마을을 찾아갔다. 중라, 상라, 매촌, 빈터, 시내, 솔악골, 묵촌, 독골, 금평, 하빈, 조랭이, 정대, 하림, 웃터, 원터, 나대실, 개터, 빈주실, 중촌, 덕암 등등.

마을의 사랑채에서 우리는 밤새 깔깔거리며 놀았다. 때로는 방 안에 모두 일제히 일어나서 손뼉을 치며 유행가를 부르기도 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노래를 그 당시에 많이 들었다. 산을 두 개 넘어서 당도했던 '웃터'라는 마을에도 갔었다. 말자와 희숙이는 듀엣으로 노래를 해댔다. 마치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는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사랑 모질게도 밟아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탑아~


그 애들의 노래에 우리는 장단을 맞추어 손뼉을 치면서 깔깔거렸다.

밤새 노래하고 떠들고 웃어댔다. 마을 사람들은 습격대같이 몰려와서 노는 우리들을 혼내지 않았다. 


묵은 김치 훔쳐오자.

홍시 어디 있는 줄 아는데..

곶감도 가져오자.


마을 인심은 산 고개를 하나 더 넘을수록 좋았다. 산을 서너 개 넘어간 마을에서는 인절미도 들여보내 주고 동치미를 챙겨주기도 했다. 군불도 뜨끈하게 지펴주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솜이불 하나 가운데 두고 별의별 게임을 하며 웃으며 놀았다. 


그렇게 웃으며 놀았던 다음 날이라도 우리 집 대문만 들어서면 일단 포커페이스가 되었다. 혹시 동생들과 약간 낄낄 대면, 아버지는 당장에 소리쳤다.


뭐가 좋아서 웃노?

웃을 일이 뭐 있노?


식사를 하다가 조용히 얘기를 해도 아버지는 우리를 혼냈다.


시끄럽다. 밥만 묵어라.


그래서 집안에서는 얘기를 도란도란해본 적도 없고 웃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집에 있을 때도 한창 학교 생활이 재미있고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면 웃음이 터졌다. 한 번은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얼른 대문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먼 곳까지 달려 나갔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무한정 웃었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집으로 되돌아올라치면 또 웃음이 나왔다. 웃음의 뿌리까지 다 뽑혀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 판이었다. 굳이 슬픈 생각도 하고 머리를 흔들어 보기도 했다. 그 웃음을 다 진정하려면 한참 걸렸다. 그렇게 웃음을 잠재운 후에야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지금도 나는 웃음이 헤프다. 사소한 것에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파안대소, 박장대소하고 나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그러다가 아주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어릴 때 맘껏 웃을 수 없었던 때가 생각난다.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 하며 주위를 살피는 버릇이 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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