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향기와 찬양Lim Jan 12. 2023

출~고향기

- 고향이나 혈육은 떠날 수 없는 것이었다

여명의 시절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들 대부분은 면소재지에 있는 신설 고등학교로 진학할 심산이었다. 그 이전 선배들은 객지로 나가 고등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되어 대부분  중학교까지만 다녔다.  물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도회지로 돈을 벌러 나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원서를 쓸 즈음에 선생님들은 농담 삼아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축복받은 거다. 고등학교가 이곳에 세워져서 너네의 학력이 고졸로 업그레이드되네?"


그 소리에 우스개 소리 전문가인 희순이는 맞장구를 쳤었다.


"맞아요, 결혼할 때 내밀 수 있는 제 학력의 레벨이 달라지는 거죠. 저는 남자가 고졸, 군필이면  결혼할래요. 고로 저 애들 모두 제 신랑감 되겠어요."


희순이는 또래 남자애들을 가리키며 키득댔다.


그곳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에 마산이나 부산으로 가는 애들도 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한*합섬'등의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좀 달랐다. 우리는 모두 우등생이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대학 졸업까지 시켜서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어 농사일을 면할 수 있기를 바라셨다. 어머니는 틈틈이 우리에게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셨다. 


"너거들은 어찌든지 공부해야 한다. 공부만이 살 길이다. 공부 안 하면 엄마처럼 고생한데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에게 학교에서도 관심이 많았다. 3학년이 되자 슬슬 진학에 대하여 선생님들이 상담하기 시작하셨다. 담임 선생님은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저녁, 고등학교에서 몇 분의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당시에 우수학생을 유치하는 학교 홍보가 뜨거웠던 것 같다.


"우리 학교로 진학하면 대학 4년 동안 장학금을 줄 게. 잘 생각해 봐."


인근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몇 분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그분들과 빵집에서 만났다.


"우리 학교로 진학하면 대학은 물론이고 미국 유학까지 보장해 주마. 미국에 졸업 선배들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야."


그분들은 입이 마르도록 그 읍내 고등학교의 커리큘럼과 시스템을 설명했었다. 멋모르는 나는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별일이네? 어떻게 너를 알고 찾아오셨지?"


아버지는 그분들이 읍내에서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뿌듯한 느낌이었는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저것 헷갈려서 진로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돌직구를 날렸다.


"흔들리지 마라.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데이. 그냥 간판 딸라고 고등학교에 갈 기 아니데이. 이왕 고등학교에 가려면 진주나 마산으로 가라. 그래야 니보다 더 나은 사람도 만나고 배울 것이 있을 끼다."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기셨을까? 타관 객지로 딸을 내보내어 공부시킬 경제적인 여력이 없는 거 같은데... 그리고 명문 여고에 진학하려면 시험에 합격도 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돈이나 나의 실력에 대해서 아무 걱정이 없는 듯했다. 


"자기네 학교에 와 달라고 찾아온 선생님들 말은 믿지 마라. 공무원은 종이 한 장이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니 앞일을 그 사람들이 우예 책임지겠노?"


나는 최종적으로 진주여고에 시험을 치기로 했다. 학교에서도 나의 진학을 위하여 선생님들이 분주해지셨다. 각 과목 선생님들이 참고서를 챙겨주시고 입시 준비를 돕기 시작하셨다. 그 당시 입시 과목 중에 음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골 중학교에는 음, 미, 체 교사가 정원대로 배치되지 않았다. 학교 생기고 처음으로 음악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그 여자 음악 선생님은 밤마다 자취방으로 나를 불렀다. 화성이며 화음을 가르쳐주셨다. 별도로 음악 이론을 배워보지 않았던 내가 입시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포켓용 요약본도 챙겨주시면서 열심히 음악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바짝 준비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는 진주 여고에 무사히 합격했다. 학교에서는 큰 경사가 난 듯이 모두 기뻐했다.


야밤의 이별식


중학교 시절은 늘 러브 레터가 오고 가곤 했었다. L은 나의 단짝 친구였다. L은 복스럽고 성격도 참 좋았다. 어느 날 J와 L이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은 꽁냥꽁냥 재미있게 사귀었다. 그러다가 한 순간 J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슬쩍 말을 걸었다.


"사실 나는  니를 좋아하는데, 괜히 편지 보내면 퇴짜 맞을까 봐서 대신에 L에게 편지를 보냈어."

"응? 그랬어? 니네 둘이 지내는 것 보니 부럽던데?"

"니가 L이랑 단짝이잖아? L과 사귀면 니가 나한테 관심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냥 둘이 잘 지내봐."

"그러면 내가 니한테 편지 보내도 돼?"

"니 맘대로 해!"


J는 대장장이 집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첩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J는 숫기가 유난히 없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고 얼굴에는 여드름이 한가득이었다. 그는 휘파람을 참 잘 불었다. 그 모습이 꽤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J는 축구를 무척 잘했다. 방과 후에 운동장을 살펴보면 축구하는 애들 중에 J의 모습만 내 눈에 들어왔다. 공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다. 그래서 내심 J에 대하여 관심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맘대로!'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 후에 J는 나에게 깨알 같은 글을 핑크빛 편지지에 가득 적어서 보내왔다. 갈등이 좀 됐었다. 그래도 짧게 답장을 보냈다. 나의 답장을 받은 J는 개선장군처럼 신이 났을 것이다. J는 그동안 감춰두었던 마음을 담아 연일 편지를 보내왔다. 어느 날 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어떻게 친구의 남친을 빼앗을 수가 있어? 니는 친구도 아니야. 영원히 절교야."


L은 눈물까지 흘리며 나에게 큰소리로 악담을 퍼부었다. 창피하고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J는 꿈쩍 않고 내게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내 친구 L에게 상처를 주게 된 것이 두고두고 죄책감으로 내게 남아있다. 평생토록 내 친구 L에게 미안한 맘이다. 결국 J와는 야밤에 만났다. 우리 골목에서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문에 진주로 갈 거야. 앞으로 편지하지 마."

"이미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캄캄한 밤이었다. J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발바닥으로 땅만 두드렸다. 잠시 후에 J가 말했다.


"좋겠다. 나는 고등학교 못 가는데."

"그렇구나. 하여간 앞으로 우린 끝이야." 


우리는 어두움 속에 묻혀서 서로 손도 흔들지 못한 이별을 했다. 시작도 하지 못한 사랑은 그렇게 어두움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이후로 지금까지 다시는  J를 보지 못했다. J에 대한 소식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맘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간 고향과 부모님

고향을 처음 떠나왔을 때는 외로움에 견딜 수가 없었다. 옆 집 강아지까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집이었는데도 떠나 보니 그리웠다. 일 년간은 맘을 잡지 못하고 지내다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예 집에 대한 그리움은 없어졌다. 교회 학생회 일을 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부모님은 부지런히 돈을 보내주는 일을 하느라 나의 생활을 알 턱이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고향에 들르면 여전히 부모님은 다투며 사셨다. 사업은 점점 확장되어 어머니의 삶은 아예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자슥이 뭔고? 더 있으면 더 주겠건만. 간이라도 빼서 주고 싶다."


고향에 가면 어머니는 앞치마처럼 두르고 있던 돈 주머니를 홱 뒤집어서 동전까지 톨톨 털곤 하셨다. 어머니는 자식 교육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사시는 분이었다. 어머니가 하시는 일은 그 무게를 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숨 막히는 일상 속에서도 부부싸움은 거르는 법이 없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마주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국립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당시의 국립사범대학은 졸업과 동시에 발령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교원 적체 현상으로 나는 미발령 교사가 되고 말았다. 힘들게 교육을 시켜 주셨던 어머니께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실망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정쩡한 내 신세가 참 싫었다. 면역력이 바닥이었는지 툭하면 감기에 걸렸다. 동시에 편도선이 붓곤 했었다.


'편도선 비대 치료가 아쉽습니다.'

라고 나의 통신표의 가정통신문 란에 늘 적혀 있었다. 그래서 시골 장터 돌팔이 의사에게 마취도 하지 않은 채로 한쪽 편도선 절개 수술을 했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쪽 편도선이 걸핏하면 욱신거려서 괴로웠다. 그냥 수술을 해버리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에 편도선 통증이 더욱 괴로웠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없어서 수술비가 대학 등록금의 4배 정도였다.  5남매 모두가 학생이라 한강의 자갈로도 부족할 판인데 나는 그냥 수술대에 올랐다. 


많이 아팠제?


아버지가 수술비를 챙겨서 오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껴본 순간이었다. 어떻게 그 수술비를 마련하셨을지 궁금했다. 보나 마나 어머니는 일수 빚을 내서 아버지 손에 쥐어 보냈을 것 같았다. 완행버스 예닐곱 시간을 타고 그 많은 돈을 들고 진주까지 오신 아버지께 양심적으로 너무 죄송했다. 돈을 챙겨서 보낸 어머니께도  죄송했다. 좀 아파도 참고 살았어야 했는데 괜히 내 생각만 했던 것 같았다. 참 못난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긋지긋하다고 여겼던 고향집이 지금은 무척 그립다. 금의환향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고 있다.  어차피 돌아간다 해도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산천마저 의구하지 않을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아들이 10년 넘게 몸져누워있다는 것이 고향에 갈 용기가 나지 않게 했다.  부모님께도 송구하여 맘이 늘 눌렸다.  


그 마음이 드러난 글은 '다듬잇돌'이라는 제목으로 브런치에 발행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mrschas/25

[사진 출처:픽사베이]









이전 05화 웃.음.꽃.이 피지  못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