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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Jan 21. 2023

어머니를 부탁해요

-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고르는 중입니다

어머니는 울산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2년 넘게 지내셨다. 그동안에 어머니는 부적응 어르신으로 연일 말썽을 피웠다. 공직에 있던 오빠는 수없이 요양원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꺼뻑하면 요양원에서 보호자 호출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요양원에서는 더 이상 어머니를 입원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시고 나온다면 선뜻 모실 만한 자식이 없었다. 자식들은 제 각각 나름대로 그럴만한 형편이 있었다. 형제들의 모든 사정을 다 아는 여동생이,

"그래도 내가 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모실 . 요양원에서 받아 주지 않으니..."라며 어머니를 맡았다.

진주에 살고 있는 여동생은 오랫동안 투병하여 힘든 몸이지만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마음을 결정했다.


우선 진주 여동생이 사는  아파트 가까운 곳에 투룸을 월세로 얻었다. 진주에서 제대로 적응하여 잘 지내신다면 어머니를 위한 집을 장만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 집에서 어머니를 간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울산의 요양원에 계실 때는 코로나 팬데믹이 심한 때였다. 그래서 겨우 면회가 가능할 때만 오빠네와 대구의 여동생네가 요양원에 갔었다. 노인들에게  2~3년이라는 시간은 큰 것이었다. 항상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어머니를 만났으니 어머니가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어머니의 다리는 근육이 다 빠지고 무릎관절은 통증이 심한 상태였다.


그래도 요양원을 떠나 오시니 마음이 안정되셨는지 어머니의 감정은 많이 차분해지셨다. 그러나 대, 소변을 해결해 드리는 일이 큰 수발이었다. 어머니가 서너 번 쓰러지셨을 때 몸의 반이 약간 마비된 상태여서 대, 소변을 누실 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셨다. 진주의 동생은 뼈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여윈 몸인데 하루에도 수차례씩 온전치 못한 어머니를 안고 내려야 했다. 동생이 어머니를  변기에 앉히는 일이나 또 어머니를 목욕을 시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동생은 인대에 무리가 오고 손목뼈가 골절되기도 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기저귀에는 절대로 소변을 누지 못하는 분이었다. 심리적으로 기저귀에 소변을 누는 일이 불가능한 분이었다.

동생의 폰에는 어머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하루에 무려 68회나 될 때도 있었다. 한 밤중이든 새벽이든 어머니는 단축키를 눌러서 동생에게 전화를 해대셨다.


어머니를 돌보던 동생이 손에 깁스를 했다. 더 이상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받아 줄 요양원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어머니가 입원해도 된다는 요양원이 있었다. 어머니는 기저귀에 소변을 누지 못하기 때문에 두 분의 특별 보호사가 더 필요한 어르신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보다 진주의 요양원에서 잘 지냈다.


울산의 오빠네와 대구 여동생네는 면회가 가능할 때마다 틈틈이 어머니를 뵈러 간다. 진주의 여동생은 요양원에 갔다가 어머니를 보지 않고 되돌아온다고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던 진주 동생을 보면 요양원에 있지 않겠다고 보채고 집에 데려가 달라고 매달릴 것 같다고 했다. 진주 동생은 요양원에 갔다가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돌아오면서 많이 운다고 했다.


나는 진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뿐더러 아들이 중증 환자로 투병 중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뵈러 가는 것 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이미 어머니는 저 세상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신데 벌써 내다 버린 듯한 생각이 든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싶어도 어머니는 가는귀가 어두워서 제대로 듣지도 못하신다. 어머니는 벽창호다.


며칠 전이었다. 어머니께 면회를 다녀왔던 여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미리 챙겨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멋지게 사진 한 방을 찍지 못하고 사셨다. 그래서 영정 사진할 만한 것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동생이 요양원에 부탁하여  영정용으로 사진을 찍었다. 동생으로부터 전해받은 사진을 보니, 아서라, 그건 아니었다. 곧 돌아가실 즈음에 영정 사진을 찍는 건 아니었다. 그 사진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을 뜨고 있는 데도 어머니의 눈은 감겨 있었다. 틀니를 빼놓고 찍은 어머니의 사진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시력이 좋아서 바느질, 미싱질을 안경도 안 끼고 잘하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력이 떨어지면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신다. 사람의 기력이 떨어지면 눈을 뜨기가 힘드나 보다. 영정용으로 찍었다는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니 눈물이 콱 쏟아진다.

"우리 엄마, 아직 살아있네."라고 농담 아닌 농담은 했지만 속이 많이 상했다.


묵촌 앞 열 마지기 논에서 타작한 벼 가마니를 리어카에 잔뜩 싣고 펄펄 나시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니었다. 대형트럭에 실려온 연탄을 각 가정으로 배달하던 여장부 어머니도 이제는 아니었다. 항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찰진 욕을 아버지께 퍼부으시던 그 어머니도 아니었다.


요며칠 동안은 사진을 캡처하고 앱을 활용하여 '자르기'도 하고 '배경 덧칠하기'를 하여 멋진 영정사진을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영정 사진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쓸만한 영정사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의논 끝에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에 있는사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영정 사진을 미리 준비해 두면 오래 사신다는 속설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니가 부럽다. 가까이에서 어머니를 뵈러 갈 수 있으니..." 나는 진주 동생에게 그렇게 카톡을 보냈다. 단숨에 달려갈 수 있다면 살아계실 때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의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한평생을 힘들게 사시다가 결국은 혼자 요양원에서 여생을 끝내는 어머니가 너무 짠하다. 자식이 곁에 없는 요양원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어머니가 이제는 애타게 그립다.


나는 지금 도대체 누구에게 나의 어머니를 부탁해 두었을까? 어머니가 마치 무덤과 진배없는 요양원에 홀로 계시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이래도 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정 사진을 준비하고 나니 이제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생각이 든다.


대구에 있는 동생네가 오늘은 새벽부터 진주의 요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하지만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면회 불가'라고 했단다. 울산에서 어머니를 보러 나서는 오빠네에게도 연락을 하여 출발하지 말라고 했단다. 아, 면회 간 형제에게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면회가 사절되어 통화를 못한 것이 내 생애의 한으로 남지는 않겠지. 사무치게 어머니가 그리워도 통화를 못해맘이 몹시 무거운 설 명절이다.




P.S. 남편은 내가 발행하는 브런치 글의 첫 독자이며 깐깐한 '교정사'입니다. 점 하나, 토씨 하나까지 다 걸러내는 남편의 불꽃같은 눈길이
오늘은 무척 이글거렸답니다.

이 글은 남편에게 엄청 혼나면서 마무리합니다. 어디 한 구석 매끄러운 부분이 없고, 어법도 엉망이었나 봅니다.

아, 오래 전에 나의 영혼까지 탈탈 털리면서 영어 글쓰기 '롸이팅 레슨'을 해주던 조지프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에 오버랩되네요.

글을 쓴다는 것이 참 어렵다고 새삼 느꼈습니다.
 
이글의 공동 저자는 'Cha 향기와 찬양' 작가의 남편입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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