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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Mar 23. 2024

추억의 '분홍 소시지전', 제가 직접 부쳐 볼게요

- '감자채 부추전'도 부치고 '부추김치'도 담갔어요

딸은 결혼하여 포항에서 신접살이를 시작했다. 인천에 사는 나는, 딸의 살림을 1도 도와줄 수 없었다. 가까이에 사는 딸에게 육개장을 끓여 주었네, 김치를 담가 주었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남모르게 배가 아팠다. 직장 생활로 정신없을 딸의 먹거리를 챙겨주고 싶은 맘이 간절했다.


딸내외가 마침내 서울로 올라왔다. 벌써 3년이 넘었다. 그들은 주말마다 우리 집에 들른다. 토요일에 우리 집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주일 예배'를 우리와 함께 드린다. 딸이 서울로 왔지만 마음과 달리 요리를 해줄 형편이 못됐다. 내 코도 석자였다. 내 먹을 것도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다. 반찬가게를 이용하고 택배를 내리 시키며 살았다. 하는 수 없이, 매주 재래시장에 들러 먹거리를 구하여 챙겨 주었다. 물론 내 카드로 결제했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꺼내먹기 좋게 찬통에 옮겨 담아 차곡차곡 쿨러백에 챙겨 보냈다. 딸내외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만나* 원리'처럼 일주일 분량만 챙겨 갔다. 많이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전부터 딸이 반찬 가게에서 분홍 소시지전을 골랐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딸은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다. 레트로 감성이 돋은 듯했다. 추억의 반찬, 소지지전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소시지를 먹었던 기억이 아득하다. 햄과 스팸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소시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요즘은 햄이나 스팸마저 정크 푸드로 여기고 가급적이면 먹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평소에 예사로 봤던 분홍 소시지전 이 한 팩에 겨우 5~6개 정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가격은 3,000원이나 했다.


생각 끝에, 분홍 소시지전을 차라리 내가 부쳐 보기로 했다. 까짓 거, 어려울 것도 아닐 듯했다. 얼핏 생각하니, 계란물에 소시지를 담가 팬에 부치면 그만일 것 같았다. 계란물에 쪽파나 부추를 송송 썰어 넣으면 될 것이고... 그런데 계란물에 부추를 넣을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에 구글 피드에 알고리즘으로 떠오른 요리가 생각이 났다. 부추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거기에 감자를 갈아 녹말 물을 뺀 건더기만 함께 넣어 전을 부친다는 유튜브 영상이었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요리 관련 영상이었다.

그래서 감자도 함께 샀다. 시작한 김에 부추 감자 부침개도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부추 한 단을 살 경우에 소시지전과 부추 부침개에 넣고도 꽤 남을 것 같았다. 남은 부추로 부추김치도 담그기로 맘먹었다.


장을 봐 왔다. 아침부터 요리가 시작됐다. 내가 만들 요리는, 엉겁결에 3종류나 됐다. 오전 내내 해야 할 만큼의 일이 커졌다. 일어나자마자 부추김치에 넣을 누룽지 풀을 쑤어 두었다. 깐쪽파가 한 단에 17,000원인데 비해 대파 한 단은 단 돈 3,000원이었다. 싼 맛에 일단 샀다. 그런데 소시지전을 부치려고 레시피를 검색해 보니 소시지전에는 대파를 넣는단다. 그렇다면 대파를 산 것이 잘한 일이었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금요일이면 한 주간의 업무를 처리하고 수업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었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나는 막 퇴임을 했고 전업 주부가 되었다. 문득문득 꿈을 꾸고 있는 듯할 때도 있다. 학교에서 근무했던 그 시간에 집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내 모양새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


먼저 배경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분수대'도 콸콸 흐르게 작동했다. 계곡에 와 있는 듯했다. 카페에 와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순조롭게 요리를 시작했다.


[누룽지 풀/ 부추, 대파, 감자, 소시지/ 만능 채깔, 감자칼]

계란은 미리 넉넉하게 깨뜨렸다. 계란 껍데기에 살모넬라균이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깨뜨려 놓은 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요리를 시작할 요량이었다. 소시지는 어슷 썰기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썰었던 소시지를 비닐봉지에 넣고 밀가루 옷을 입혔다. 그런 후에 채 썰어 둔 대파를 계란물에 넣고 섞은 것에 밀가루를 입힌 소시지를 담갔다. 하나씩 건져서 달구어진 팬에 천천히 부치면 끝이었다. 소시지전을 다 부친 후에 남은 계란물로 전을 부치면 '대파 송송 부침개'가 된다. 그것도 먹을 만했다.



1교시 수업이 끝나듯이 분홍 소시지전 부치기가 끝났다. 간이 맞는지 한 번 먹어봤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옛날 맛 그대로인지 또 한 개 먹었다. 맛있어서 하나 더 먹었다. 전을 부치며 대여섯 개는 해치운 것 같다. 자꾸자꾸 손이 가는 맛이었다. 예전에 먹었던 소시지 맛보다 좀 더 나아진 것 같았다.


다음은, 부추를 씻어서 물기를 빼고 8cm 정도씩 잘랐다. 그것을 액젓으로 밑간해 두었다. 부추를 한쪽에 제쳐두고 감자채 부추전을 부칠 참이었다. 내가 유튜브에서 본 것은 아무래도 번거로울 것 같았다. '감자를 갈아 녹말 물을 빼고 건더기만'이라는 부분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감자채와 부추로 부침개 하는 레시피를 굳이 찾아봤다. 그 레시피대로 먼저 감자를 만능 채칼로 채 썰었다. 이어서 부추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 후에 함께 섞었다. 여기서 신박한 팁이 있다. 반죽할 때 카레 가루를 넣는 것이다. 레시피에는 을 넣는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미리 깨뜨려 놓은 것이 있어서 함께 넣었다. 밀가루를 살살 가미하며 반죽을 했다. 이때 반죽의 정도가 매우 중요하다. 되직하다 싶을 정도로 하면 된다.


[감자채/ 부추 썰어 두기/ 함께 버무리기]

내가 사용했던 레시피다.

https://www.10000recipe.com/recipe/6852123#google_vignette



[감자채 부추전의 반죽은 되직하게 / 팬에 부치기/ 완성된 감자채 부추전]


2교시 수업이 끝날 때쯤에 제2탄 요리, 감자채 부추전이 완성됐다. 맛을 봤다. 간을 본다는 핑계로 따뜻할 때 맛있게 먹었다. 카레 향에다 살살 씹히는 감자채의 식감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이런 부침개는 처음 먹어본다. 양념간장이 필요 없었다. 간도 적당하고 느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추김치를 담갔다. 액젓으로 간해 둔 부추에서 국물을 따라냈다. 레시피대로 했더니 그냥 이게 바로 밥도둑이었다. 이 레시피에는 없었지만, 나는 미리 끓여두었던 누룽지 풀을 넣었다. 레시피 상으로 특이한 것은 꿀을 넣는다는 것이었다. 부추와 꿀이 잘 어울렸다. 부추김치가 이렇게 맛있다면 반칙이다. 왜냐하면 조리과정이 쉬어도 너무 쉽기 때문이다.


 https://m.10000recipe.com/recipe/6894197


내가 보기에는 레시피에 나와 있는 부추김치 사진보다 내가 담근 부추김치의 비주얼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부추김치 장사나 해볼까 싶다. 이 맛은 전문가의 수준인 듯하다. 부추김치가 맛있게 담가져서 기분이 좋았다. 이러다가 요리 장인이 되려나?


아침부터 주방을 전쟁터처럼 어지럽히며 요리 재료를 다듬고, 씻고, 부치고, 지지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여러 단계의 손길이 간다. 3개의 요리가 끝나니 학교로 치면 3교시가 끝났겠다 싶었다.


고생은 했지만 딸내미에게 내가 직접 요리한 반찬을 싸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부추김치를 맛보는데 부추에 얽힌 유년의 추억이 소환됐다. 4교시 수업이 시작될 때쯤인 것 같았다. 마가렛트 쿠키에, 디카페인 믹스 커피를 타서 마시며 추억에 빠졌다. 학교에 있었다면 연강 3시간 끝내고 밀린 업무 해내느라 정신없었을 4교시 수업시간 쯤을, 나는 추억놀이를 하며 보냈다.




정구지* 를 먹던 시절


고향의 안산 밑에는 우리 정구지 밭이 있었다. 마을 앞에는 앞산, 남산, 안산이 있었다. 잘 사는 사람들의 밭은 주로 앞산 밑에 있었다. 앞산에 심긴 작물들은 기름지고 윤기가 났다. 씨알도 토실했다. 우리 밭은 홈소굴이나 띠뱅이 등, 발치 사납고 먼 곳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밤에 누가 다 여문 곡물을 훔쳐가도 모를 판이었다. 도둑이란 게 없던 시절이라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앞산 옆에 있던 남산 언저리에 묻히셨다. 큰댁 오촌 당숙은 우리 밭이 먼 곳에 있는 줄 익히 아셨다. 당숙이 아버지의 몸을 뉘일 산자락을 내주셨다. 그 남산은 큰댁 소유였다. 큰 할아버지는 남산도 가지고 있었고 커다란 집도 지니셨다. 그런데 왜 우리 할아버지는 오두막집에 제대로 된 땅뙈기도 없었는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가 큰댁 할머니를 번번이 혼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도대체 이 하극상은 무슨 연고였을까?


"성님, 그 고무신 바로 신으소."

"그래, 그래, 내가 그랬나?"

"그 검정 고무신 좀 버리소. 발가락이 다 나왔네."

"그래도 아직은..."

"하얀 코고무신이 예쁜데, 청승스럽게 다 닳은 검정 코고무신을 끌고 다니능교?"

"아무 것이면 어때서?"

"성님, 그 코 좀 닦으소. 추접스럽게."

"내 코가 나왔나? 앵앵."


큰댁 할머니는 이도 누랬고 코도 잘 닦지 않으셨다. 입을 늘 벌리고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손위 동서인 큰댁 할머니를 다그치곤 했다. 가진 땅뙈기도 보잘 것 없고 오두막집에 사셨던 우리 할머니가 큰댁 할머니에게 매콤하게 말씀하곤 하셨다. 나는 남몰래 그것을 즐겼다. 속이 시원했다.


안산 밑자락에 있던 우리 정구지 밭은 네모 반듯하지도 않을뿐더러 손바닥만 했다. 서너 고랑 크기의 밭이었다. 가로, 세로 두 걸음 길이도 못 되는, 밭 같지도 않은 밭이었다. 아마도 국유지였을 것 같다. "여긴 내 땅!" 하고 침 뱉으면 내 밭이 되던 시절이었다. 안산은 앞산이나 남산과 달리 응달이었다.


그 밭에 할머니는 정구지를 심으셨다. 정구지밭 어귀에 있던 아름드리 밤나무가 밤낮 주야로 정구지밭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만고에 정구지밭이나 할 만한 땅이었다. 정구지는 뙤약볕보다는 약간 그늘진 곳이 적격인 모양이었다.


할머니 심부름으로 소쿠리 들고 가서 정구지를 베어 오곤 했다. 싹둑싹둑 잘랐던 밑동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파릇한 새싹 정구지가 다시 올라오곤 했다. 질긴 생명력이었다. 짚단을 불 때고 난 재를 정구지 밭에 거름으로 내갔다. 재가 거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정구지는 무공해였다.


그 정구지로 요리를 해 먹었던 기억은 없다. 다만 냇물에서 잡은 고디*로 끓인 초록빛깔 국에 정구지를 넣어 끓였다. 우리는 그것을 '고디국'이라 불렀다. 고디국에 정구지를 넣으면 그 맛은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삶은 고디를 탱자 가시로 쏙 뽑아냈다. 고디 속은 탱글탱글했다. 쫄깃하고 쌉쌀했는데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전날, 술로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왔던 아버지께 정구지 넣은 고디 국물은 해장국이었다. 어머니는 육두문자로 욕을 퍼부어 대면서도 고디국을 끓여 아버지께 드렸다.


지금도 그 정구지 밭이 있는지 궁금했다. 로드뷰로 고향에 가봤다. 산천은 의구하지 않았다. 정구지 밭은 흔적도 없었다. 40~50년 세월 동안 옛 모습이 사라진 고향이 그래도 나에게 손짓했다. 정구지 추억 때문에 고향이 더욱 그리워졌다. 로드뷰에 보이는 고향집은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지만 허물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했다. 고대광실처럼 좋은 몇몇 집에 비해 내 고향집은 비루하고 지난해 보였다. 안쓰러워 보였다. 고향 그 옛집이...





* 만나:  성경에 등장하는 음식 이름이다. 새벽마다 내리고 해가 뜨면 없어졌으며, 너무 거두면 곤충이 먹으므로 있어야 할 만큼 거두어야 했다.


* 정구지: 경상도와 충청도에서는 부추를 정구지라고도 한다.

* 고디: 다슬기



#소시지 전  #부추김치  #감자채부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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