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와 대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활동보호사, K샘으로부터 의문의 문자를 받았다. 먼 길 떠났다가 오고 있는 우리를 득달같이 보겠다는 그분의 의중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저희가 고향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K샘의 말을 듣는 순간, 표정 관리부터 했다. 그냥 담담한 척했다. 그렇다고 울 것인가? 웃을 수는 더욱 없었다. 어질어질했다. K샘의 말은 우리에게는 폭탄선언과 같았다. 하루아침에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활동보호사가 활동보조 이용자에게 보름 전에 통보해야 하는 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출타했다가 돌아온 그날로부터 보름 후에 이사를 가신단다.몇 개월 전에 그런 계획이 있노라고 언질을 했더라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그런 말을 들으니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갔다.
몇 번인가 K샘 부부가 지방으로 다니러 가긴 했는데 부모님을 뵈러 가거나 형제 모임이 있어서 가는 줄 알았다. 자신들이 살 터전을 마련하러 갔던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둔감했던 것인지 그분들이 감쪽같이 일처리를 했던 것인지? 어쩌면 그분들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도는 것보다 깔끔하게 최후에 통고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5년이 넘도록, K샘 가정과는 집도, 차도 공유하며 한 가족처럼 지냈다. 거의 경계선이 없을 정도로 더불어 지냈다. 그렇게 지냈던 K샘 부부가 우리 곁을 떠난단다. 아니, 우리 아들의 곁을 떠난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일이었다.
"전셋집도 구했고, 이사 날짜도 잡혔어요. 앞으로 남은 보름간 저희 후임을 잘 구해보십시오."
그동안 그분들은 우리 아들의 활동보호사로 일하면서 시드 머니를 차곡차곡 모았던 모양이었다. 그 돈으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은 잘 된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분들은 계획을 세웠을지도 몰라.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이일을 그만 두기로..."
"그런 건 아닐 것 같아요. 나이는 들어가고 건강을 생각하다 보니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일 거예요."
우리는 나름대로 추측했다. 그러나 그분들이 어떤 계획을 했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당장에 그분들이 비우고 가는 자리에 근무할 사람을 구해야 했다. 우리 아들은 24시간 내내 돌봐야 하는 중증 환자다. 그래서 반드시 그분들이 떠나는 자리를 채울 활동보호사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이 제대로 풀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K샘 부부가 맡은 부분이 하루 24시간 중에 16시간이나 되기 때문에 그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은 쉽지 않을 듯했다.
K샘 내외가 떠난다는 것은 교회에도 상당한 파장이 될 것 같았다. 코로나 시대를 그분들과 함께 통과하며 우리는 신앙의 동지애를 느꼈다. 성도들은 그분들과 잔뜩 정이 들었다. 어려울 때 쌓은 정이 더 돈독한 법이다.
그런데 그분들 입장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5년 동안 밤낮 주야로 수고하던 일을 내려놓고 시골에서 힐링하며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분들이 우리 아들을 돌보는 일로 전세자금을 마련했고 마침내 형편이 되어 부모 형제 곁으로 가는 것은 좋은 결단인 것 같았다. 섭섭한 마음과 축복하는 마음이 반반이었다. 양가감정이었다. 하지만 양가감정이 제일 힘든 법이다.
조직에서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맡았을 때, 그가 그 자리를 빠지는 상황이 오면 일이 크다. 그 출렁거림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 K샘 내외는 살 궁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그렇다 치고 그 나머지 몫은 모두 우리의 것이었다. K샘 부부가 맡은 부분이 많았던 만큼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도 컸다.
K샘은 그런 작별의 말만 남기고 황망히 나가셨다. K샘 내외가 그런 결정을 갑자기 내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결국, 사람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법이다. 그걸 생각해보지 않았던 우리가 어리석었다.
그날, 우리는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K샘 내외분의 후임을 구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는 푸꾸옥 여행도 계획되어 있었다.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그 여행을 취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다. 묘안이 없었다.
엑셀에 '버전 1'부터 '버전 5'까지 시트 이름을 넣고 다양하게 판을 짜봤다. 이런 게 쉽지 않은 이유는 이리하면 여기가 걸리고, 저리 하면 저기가 걸리게 되는 세부적인 법이 많았다. 1일 8시간 근무, 주 40시간 근무, 주 1일 휴무 등등... 가로, 세로, 대각선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되는 법이었다. 정답을 모르면서 밤새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꼴이 되었다.
이튿날 센터에 연락했더니 현재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 잘 배치해 보라고만 했다. 그건 차라리 새 판을 짜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리고 기존에 근무하고 있는 활보샘마다 사정이 달랐다. 어떤 요일에는 못하고, 몇 시부터는 안 되고... 다른 일을 겸하고 있던 분들은 그쪽에도 단시간에 정리를 해야만 했다. 싹 갈아엎는 게 차라리 더 편할 판이었다.
거의 3일 만에 모든 분들의 조건을 고려하여 간병 체계를 완성하긴 했다. 그렇지만 금, 토, 일 오후(2시~10시) 타임이 달랑 남았다. 그 파트만 붕 떴다. 기존에 있던 분들의 욕구에 충족하게 간병 체계를 완성하고 나니 남은 파트는 최악이었다. 이 조건에 활동보호사로 오겠다는 분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누가 주말 오후를 고스란히 간병하는 일로 보내려고 하겠는가? 지역에 있는 7군데의 센터에 다 연락을 했으나 그런 조건으로 근무하겠다는 활보샘은 당장에는 없다고 했다. 난감했다. 한두 달 정도의 여유를 두고 후임을 구했더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다급하게 빈자리를 해결하는 일이 몹시 어려웠다.
보름 동안 사방팔방으로 활보샘을 찾았다. 겨우 주말 오후 파트를 맡을 활보샘을 구하긴 했다. 그런데 연세가 많은 분이었다. 일을 익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늙은 개를 가르치지 말라.'라는 서양 속담이 생각났다. 그분은 주중에 하는 일이 있는데 용돈을 벌기 위해서 주말 파트만 찾았다고 했다. 그분은 이 일을 처음 하는 분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단말기 사용하는 일이 서툴러 에러가 자주 났다. 활보샘으로서의 기본 마인드가 되어 있지 않은 분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시간대에 근무를 하겠다는 분을 구했다는 것으로 일단 한숨을 돌렸다. 나는 그분이 근무하는 시간에 함께 아들 곁에 있었다. 일을 가르쳐 드려도 그분은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렸다. 활보샘들은 '신체 활동 지원' 혹은 '가사 활동 돕기', '이동 돕기'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여 근무한다. 그분은 우리 아들의 '신체 활동 지원'으로 오신 분인데 오히려 '가사 활동 돕기' 쪽의 일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아들의 소변을 갈아 줄 타임에 화장실 청소를 하기도 했다. 노트북을 들고 오거나 자신의 업무 문서를 들고 와서 처리하기도 했다. 불면증이 있다는 그분은 근무시간에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푹잠을 자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간 그분이 일을 잘 익히도록 도왔다. 불안한 맘은 있었지만 그분이 어느 정도는 해내실 것 같아서 우리는 푸꾸옥 여행길에 올랐다. 아들을 병상에 남겨 두고 우리 부부가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은 처음이었다.
이럴 때 K샘 내외가 있었더라면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자신의 일처럼 처리하신 분들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분들은 떠나버렸다.
K샘 내외가 떠난다고 말한 날부터 우리 부부는 건강에 이상 증세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오랜 지병이었던 이석증이 도져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런 몸으로는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남편은 귀에서 하이 소프라노 같은 고음이 계속 들린다고 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귀에 아무 이상은 없다고 했다. 심한 스트레스 등으로 뇌에서 보내는 신호라고 했다.
게다가 나는 입술이 부르텄다. 입술 양쪽에 잔잔한 물집이 가득해졌다.
우리가 푸꾸옥에 있을 동안에 아들은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새로 오신 활보샘이 우리 아들의 체위를 해줘야 하는 것을 잊어버려서 그랬던 것 같다. 하필 우리의 여행 기간이 그분이 근무하는 타임이었다.
이리저리, K 샘네의 급작스러운 사퇴는 우리에게 쓰나미였다.
K샘 내외분의 떠남은 우리에게 큰 파도가 훅하고 쓸려 간 것 같았다. K샘이 우리의 삶으로 들어올 때는 잘 몰랐는데 떠난 빈자리는 너무 컸다. 우리 삶 전체가 마구 흔들렸다. 그것으로 인한 멀미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K샘 내외가 떠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특히 주말 오후 파트를 맡은 활보샘은 앞으로도 계속 신경이 많이 쓰일 것 같았다. 새로운 후임자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아들의 투병 이후 12년 동안 우리 쪽에서 요양사나 활보샘을 손절한 경우는 없었다. 우리 부부는 그런 말을 못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섭섭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과도 짧은 만남, 긴 이별을 해야 할 것 같다.
K샘과는 긴 만남이었고, 주말 오후 파트 활보샘과는 짧은 만남이었다.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지만 그 과정은 참 힘들다.